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일상적인 이유로 헤어졌어 V2
    지난 글 2021. 4. 19. 22:11
    728x90
    반응형
    SMALL

    Photo by Brooke Cagle on Unsplash

     

    우리 두 사람의 ‘사랑’에 의심은 없었다. 이제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상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받아들이지 못 할 행동이 없고 이해하지 못할 사고방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항상 함께 했다. 서로 교제한 지 6개월, 우리는 집을 합쳤다. 각자 대학부터 자취를 해왔다. 본가가 모두 지방이다. 고향은 같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1일!’이라고 말했던 때가 기억난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고백했다. 서로 해외 세미나에서 만났고 팀 빌딩에서 한 팀이 됐다. 같은 일을 해서 그랬을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다. 손발이 잘 맞았고 그렇게 1주일간의 세미나를 무사히 마쳤다. 다행히 팀별 발표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5명의 팀원이 잘 어우러진 이유가 컸지만, 그녀와 그의 마음 통함은 그 이상이었다. 함께 귀국했고 공항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따로 먹었다. 거기서 그녀가 그에게 고백했다. 고백이라고 해서 ‘너를 사랑해’라든가 ‘너를 좋아해’라는 표현은 아니었다. ‘내일 뭐해?’가 그녀의 물음이었고, ‘아마 너랑 저녁 먹고 있을 걸?’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오늘부터 1일!’이었다. 

     

    그 다음날 퇴근 후 만나서 그들은 친구보다 가깝고 부부보다는 먼 관계가 됐다. 두 사람이 공감한 것은 ‘사랑해’라는 표현의 진부함이었고, ‘연인’이라는 낡은 관계 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함께 하는 관계가 되자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 됐다. 그들은 일에서 서로 잘 통하는 것으로 사적인 관계를 맺자고 합의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지배적인 감정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맞춰보고 나서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하지는 않는다는 것. 손발이 잘 맞은 그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는 것.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서의 반려 결정. 너무도 흔한 사랑의 시작. 아니 관계의 시작.

     

    Photo by @whoisbenjamin on Unsplash

     

    처음에는 이랬다.

     

    “뭐 먹을래?”

    “난 미소 라멘. 너는?”

    ‘윽, 난 시오 라멘인데.. 그래도..’

    “나도!”

     

    웃으며 말했고, 상대가 좋아하는 맛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시오 라멘이 좋아’라는 꼬리가 남았다. 만일 ‘난 시오 라멘을 좋아하는데, 서로 나눠 먹어 볼까? 난 미소 라멘은 안 먹어 봤어’라는 식으로 누군가 말을 하는 것이 당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각자 기호를 가지고 만나 서로의 기호를 경험해 보고 왜 좋아하는지를 묻고 ‘아, 이런 맛도 있구나’로 연결됐을 것이다. 더구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끝까지 먹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미소 라멘 두 개 주세요.”

    “어? 난 시오 라멘 시킬 건데?”

    “지난번에 같이 먹었잖아. 좋아한 거 아니었어?”

    “아... 그랬지. 오늘은 시오 라멘 먹고 싶어서.. 그렇게 주문해.”

     

    불편함이 생겼다. 시오 라멘을 고집하면 예전에 거짓말한 것 같이 생각됐다. 처음 관계를 시작할 때 두 사람에게는 각자 다르지만 일정 수준의 긴장감,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가족에게도 하지 않았던 집중을 보인다. 그것이 연애 아닌가?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나? 이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 아닌가? 하지만 긴장이 스트레스로 전환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오늘 어디서 만나?”

    “넌 어디가 좋은데?”

    “강남역 6번 출구 앞 ㅇㅇㅇ에서 만나자!”

    “거긴 좀 시끄럽잖아. 10번 출구 앞 ㅁㅁㅁ에서 만나자.”

     

    그녀에게 카페는 차와 독서를 즐길, 혹은 카페가 재생하는 음악을 즐기는 장소다. 주로 찾는 카페는 LP판을 잔뜩 가지고 있거나 등을 묻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 즐겨 찾는다. 그는 만나면 대화를 하려니 캐주얼하고 왁자한 카페를 원한다. 대화하는 사람들 속에 있고 싶어 한다. 

     

    Photo by Kacper Chrzanowski on Unsplash

     

    그녀는 주말이면 산에 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른 연인들처럼 번화가 카페나 극장, 레스토랑 등을 함께 갔지만 함께 살면서 주말이면 아침에 그를 깨웠다. 서울 주변 산을 주말마다 바꿔가며 하이킹을 다닌다. 함께 살기 전에 그에게 제안해서 둘이 같이 간 적도 있고 그의 표정도 좋았다. 함께 살면서 부담 없이 아침에 그를 깨웠다. 그에게 주말은 평일의 피로를 푸는 날이다.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점심 전에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되도록 푹 쉬려고 한다. 함께 살기 전에 그녀와 산행을 하고 와서 몸살을 앓았다.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꽤 힘들었다. 그의 회사는 업무 강도가 남달라 철야 아니면 야근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되도록 일과 시간에 일을 끝내려고 집중력을 긁어모았다. 그러니 주말 오전 휴식이 더 필요했다.

     

    그녀는 막걸리를 좋아한다. 맥주, 소주, 양주 모두 회식을 통해 경험해 봤고 대학 때는 주로 생맥주와 소주를 마셨지만, 지방 출장 가서 막걸리를 마셔보고는 자신에게 맞는 술은 막걸리라고 결정했다.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경우가 아니면 그녀는 항상 막걸리를 시킨다. 그는 와인이다. 클래식과 와인은 공부를 해야 더욱 즐겁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알아보고 즐거움을 더하는 것에 흥미가 높다. 700ml 1병에 20~30만 원하는 고가 와인에 투자한 적도 많다. 이번에 집을 합칠 때도 소형 와인 냉장고를 가져왔다. 와인 안주에도 까다롭다. 배운 조합도 있지만 스스로 발견한 조합도 있어서 와인을 마실 때 안주는 따로 시킬 정도다.

     

    그녀는 해외 음악을 즐긴다. 알앤비나 얼터너티브, 재즈나 포크 음악을 주로 듣는다. 그녀가 DM이나 톡으로 공유한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는 모두 해외 음악이다. 그는 가끔 클래식을 듣는다. 교향곡보다는 비올라 연주나 클래식 기타 연주를 좋아한다. 어쿠스틱 음악을 즐기고 일상에서는 국내 음악 중 발라드나 알앤비, 포크 음악을 즐긴다. 다행히 장르적 공통점이 있어 재생목록 공유는 각자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육식보다는 채식을, 그는 채식보다는 육식을 좋아한다. 그녀는 밥을, 그는 빵을 더 좋아한다. 그녀는 젓갈을 그는 치즈를 더 좋아한다. 그녀는 한식을 그는 양식을 더 선호한다. 그녀는 김치 없이 식사하기 어렵지만 그는 김치 없이 살 수 있다.

     

    Photo by DocuSign on Unsplash

     

    서로의 취향과 기호의 차이는 서로 만나기 전 20년 내외에 형성됐다. 처음 각자의 기호와 선호는 신선했고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오, 좋은데’라는 개안의 기회도 됐다. 그렇지만 함께 살게 되면서 생활비 통장을 만들고 공과금을 함께 내며 월세를 함께 내기 시작하면서 각자 기호를 지키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 됐다. 좋아한다고 상대를 무조건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정신적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기호나 선호를 침범한다고도 느낀다. ‘이번엔 와인 마시자’ 혹은 ‘젓갈로 밥 먹어봐’라는 말이 처음 한두 번에 좋았을 뿐이다.

     

    그는 직접 밥을 해 먹었고 그녀는 장을 보는 비용으로 외식을 하거나 배달을 시켰다. 그는 주방 생활에 익숙하지만 그녀는 거실 생활에 익숙하다. 함께 살면서 그녀를 위해 항상 그가 식사 준비를 했다. 설거지는 그녀도 했지만 주로 그가 했다. 그가 한 결과가 더 좋았다. 이것이 ‘이번엔 네가 좀 하지’라는 생각을 일으켰다. ‘오늘은 배달 음식으로 하지’라는 불편함이 그녀에게 생겼다. 생선을 구우면 꽤 오래도록 창을 열고 환기를 해야 했고, 삼겹살을 구우면 주방과 거실 바닥에 덜어진 기름기를 닦아내야 했다. 둘 다 청소를 즐기지 않는다. 늘지 않는 그녀의 살림, 쫌스러워 보이는 그의 살림. ‘왜 함께 살자고 했을까‘라는 싹이 터졌다. 밤에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만나던 때는 이런 고민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불편함만 축적된 것은 아니었다. 함께 청소하고 함께 산책을 다니고 함께 빨래방에 가고 함께 극장을 가고 하는 일이 즐거웠다. 친구들과 항상 할 수 없어 혼자 하던 일상을 함께 할 짝이 생겼다. 포근함과 다정함이 외롭지 않게 했다. 한밤중 대화할 상대가 생겼고 아픈 나를 위로하고 돌봐주는 사람이 생겼다. 병원에 함께 가고 늦은 밤에도 약을 사러 달려가는 사람이 생겼다. 열이 높은 그녀 곁에 졸면서 지키는 그가 있었다. 열이 높은 그의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주는 그녀가 있었다.

     

    Photo by Josh Duke on Unsplash

     

    부족함이나 결핍은 제어하지 않는 한 스스로 자란다.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어느새 상대가 나를 이해하지 않는 기준이 됐다. 말없이 잘 통하던, 잘 맞던 손발이 왜 어긋날까? 더구나 지난번 이야기했는데 잊은 건가? 우리 사이 괜찮은 건가?

     

    20여 년 동안 각자의 몸에 익숙한 습관이 애정을 기반으로 한 1년으로 고쳐질 리 없다. 남의 상황이라면 그녀와 그 역시 ‘그렇게 빨리 고쳐질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어디서 배울 것인가? 함께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을. 그래서 연인이었지만, 일상적인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그렇게 큰 사랑,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던 사랑의 아가리가 이젠 좁쌀 하나 들어갈 수 없게 좁아진다. 

     

    만나기 전 세월에 형성된 기호와 선호가 고치고 개선할 부분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만나기 전에 각자는 속했던 집단의 규칙 속에 살았다. 그 안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관, 기호, 선호가 개성이 되고 독특함이 된다. 

     

    Photo by Anna Tarazevich on Unsplash

     

    이제 두 사람이 만나 한 공간에서 함께 산다. 혹은 함께 살지 않아도 두 사람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집단의 형성이다. 집단이 새롭게 구성되면 그에 맞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법전이 필요한 것도, 위반하면 징벌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함께 살기 위해 함께 지킬 내용을 하나 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반드시 집단 규칙 속에만 살 수 없다. 오히려 연인이라면, 서로 대등한 관계이므로, 각자의 개인 영역을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서로 섞이기 위한 완충지대 같은 것이다. 적어도 그 영역에 있을 때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하나 세운다. 그리고 함께 하는 공간에서 각자의 기호 및 선호에 맞는 일을 번갈아 가며 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는 규칙이 둘이다. 마지막으로 결혼을 한 것이라면, 상대 집안에 대해 조심할 부분과 알아야 할 부분에 대한 정보 교환을 하는 것이 규칙 셋이다. 이 정도의 규칙만 있어도 우리는 말없이 손발이 맞는 인생의 반려이자 동료를 잃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내 뜻대로 해도 되잖아’라고, 마치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몰아세울 필요도 없다. 공동의 공간에서는 서로 양보하도록 새로운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기호와 선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며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 뿐이지, 동거하지 않아도 할 것은 다해 남자는 (아)저씨, 여자는 (아)줌마가 되지 않나. 즉, 성인이 됐다는 것이다. 몸만 그렇게 성숙해지지 말자는 의미다.

     

    일상적인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는 모든 커플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그들의 속내를 상담해 알아내지 않아도, 그렇게 멀리 보지 않아도, 내가 있는 세상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굳이 타인을 보지 않아도 나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요즘은 잘 들리지 않는다.

    ‘이제 결혼할 나이야.’

    ‘결혼 했으니 아이를 낳아야지.’

     

    Photo by Isaac Quesada on Unsplash

     

    마치 당연히 누구나 지켜야 할 것 같이 말하는 무책임한 발언이 많이 줄어들었다. 화자 주변에서는 그렇다. 20대 후반이 되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무슨 문제가 있나?’하는 시각이 점점 줄었다. 딩크족은 아니라도 ‘결혼한 지 4년이 넘었는데 아직 아이가 없네?’하는 시각도 많이 줄었다. 비혼이 늘어서 일까? 만혼이 늘어서 일까? 아이를 덜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각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혼에 넘기지 말아야 할 나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했다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시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자는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결혼과 아이 낳기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안에 그릇을 만들거나 키우는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담고 아이를 수용할 마음의 그릇을 마련할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할 마음의 그릇을 갖거나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간혹 ‘결혼하면 안 될, 아이를 낳으면 안 될 상황’을 보곤 한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수용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 말이다. 반드시 상대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만 30대이지 마음은 10대인,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마음에 수용할 준비를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필수나 절대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미 피가 끓고 호르몬이 뻗는데 어떻게 견딜 것인가? 본능에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충동이 일어나는 나이가 분명히 있다는 의미다. 미리 준비하기에 너무 바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생을 하면서 깨달음에 이르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났다는 의미다. 

     

    Photo by Colin Lloyd on Unsplash

     

    연애, 동거, 결혼, 가족 이루기는 분명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헤어짐의 아쉬움과 안타까움, 이젠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막막함을 겪는다. 타인과 손을 잡는 것만큼 막무가내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 성당에 가서, 교회에 가서, 사찰에 가서 빌고 빌고 또 빈다고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 간 관계는 내 마음의 크기에 달려 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나고 나서 피식피식 웃을 이유로 갈라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랑 #연인 #동거 #결혼 #가족 #자녀 #이별

    반응형
    LIST

    '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 하기  (0) 2021.04.20
    숯불 구이, 연탄불 구이  (0) 2021.04.20
    등 뒤에 무엇이 있나요  (0) 2021.04.19
    마트 장보기로 돌아갈 거야  (0) 2021.04.14
    슈즈, 클래식 라인에 눈이 가다  (0) 2021.04.13
도시 생활 Urbani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