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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걸어보자.
건조한 여름엔 쉴 곳이 있다. 바람이 불거나 그늘 아래는 여름 아닌 시원함이 있다. 달아오른 도로 위를 걸어도 답답함이 없다.
냄새는 달랐다. 서양이라 해서 버터나 고기 구운 노린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표현을 생각할 시간 없이 후각 신경의 피로로 곧 사라져 버렸지만.
도착 첫날의 걷기는 체류 기간 중 가장 힘든 걷기였다. 공항에서 숙소에 도착하고 택시에서 짐을 내린 후 나의 첫 걷기가 시작됐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6층까지 총 50kg이 넘는 짐 옮기기. 가장 부피가 큰 이민 가방(32 kg). 쭈그려 앉아 가방에 등에 지고 60도 정도 허리를 숙인 후, 한 칸에 22개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백 팩과 작은 캐리어(약 10 kg)를 들고 다시 6층을 오른다. 지금까지 걷기 경력으로 보면 3일 치 걷기는 이미 완료한 셈이다. 내부 수리가 마무리되는 것은 내일. 뉴욕의 첫 밤을 보낼 또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섰다. 옷은 갈아입지 못해 등짐 지고 흐른 땀으로 척척할 정도.
이스트 빌리지의 숙소를 등지고 좌측으로 한 블록 걸어가니 견디기 힘든 냄새가 훅 덮친다. 온갖 향신료 냄새가 뒤섞인 인도 레스토랑 거리의 냄새. “윽, 이거 뭐야!” 싶을 만큼의 강도와 농도. ‘여기는 되도록... 아니면 비 오는 날에..’ 땀에 젖은 옷에 냄새가 달라붙을까 봐, 계단 오르기로 덜덜 떨리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디겠네.’
밖으로 나와야 했으니 나선 김에 유니온 스퀘어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가다 보면 카페도 있겠지. 경로는 St. Marks Place를 거쳐 유니온 스퀘어로 올라가기로 했다. 당시 유행하던 ‘I Love New York’ 가이드의 지도를 보고 관광을 하며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 St. Marks Place의 스타벅스까지는 약 0.5 마일 정도. 인상 깊었던 인도 레스토랑 거리를 지나 좌측으로 돌았다.
Little Japan이라 해도 될 만큼 도로 양쪽에 일본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인도 레스토랑 거리에서도 느꼈지만, 차이나타운처럼 독특한 입구가 있지 않은데도, ‘아, 인도 거리’, ‘아, 일본 거리’라고 여기게 된다. 상가의 외관이 각 국가의 고유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타투 샵,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캐릭터 혹은 그에 준하는 다양한 디자인의 의류 매장, DVD 등 컨텐츠 매장, 레스토랑 등이 연결되어 배치됐다. 이스트 빌리지가 1960~70년대 히피 등 반체제 문화 지역이라는 말이 기억날 정도로, 일본 문화 거리는 그 전형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 거리였다. 아마도 어두운 실내, 반 지하의 형광 조명의 타투 가게, 티셔츠의 도안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일 것이다.
골목을 벗어나니 탁 트린 St. Marks Place가 나타난다. 정면에 삼각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스타벅스. 이 스타벅스는 내가 가본 매장들과는 다른 몇 가지 매력이 있다.
옥외 테이블. 햇살 좋은 날 실외에 앉아 커피와 독서를 즐기는 일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반가운 장소다.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옥외 테이블은, 거리 사람들의 속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 옥외 테이블들은 보도와 분리되어 있어 오롯이 휴식의 공간이다. 보도 쪽이 아니라 매장을 등지고 앉으면, 나름 폭 파묻혀 앉은 효과도 있다.
두 번째는 맛. 우유 맛보다 커피 맛이 진한 라테. 며칠 뒤 마신 콜라, 뉴욕에서 새로 구입한 담배도 동일한 느낌을 준다. 탄산보다 원액이 ‘진한’ 콜라, 담배 맛이 더 많은 담배. 동일 브랜드 상품이라도 지역색이 있겠지만, 차이를 안다기보다 ‘이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유 맛이 더 많이 나면, 탄산 맛이 더 많이 나면 왠지 속아서 산 느낌이다. 커피, 콜라, 담배는 ‘뉴욕에 가야 맛볼 수 있는 것’이 됐다. 같은 브랜드라도 결코 향수를 채우지 못했다.
세 번째, 크기. 뉴욕 스타벅스 벤티 컵은 높이가 30 cm에 가깝다. 다 마시면 한 끼가 해결되겠다 싶을 정도. 우리는 뉴욕의 그란데 컵을 벤티로 마시고 있다. 벤티 컵은 몇 개 구해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속은 기분이라기보다 부족한 느낌에서다. 왜 컵 크기에 차이가 생긴 걸까? 현지화 localization 인가? 우리나라처럼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라의 현지화?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옥외 테이블에 앉으니 허벅지가 찌릿했다. 0.5 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 피트니스 센터를 다닐 것이 아니라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 부족. 단 4 글자로 요약이 된다. 백팩의 무게도 20%까지 낮추었고, 신발은 쿠션 가득한 나이키 운동화. 속보도 아닌 보통 걸음에, 관광하는 눈에 맞춘 속도. 그럼에도 많이 지킨다. 아마도 6층까지 짐을 옮긴 여파이겠지만, 난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강해야 해’라는 사고방식이 내 머릿속에는 있었나 보다. 버릴 사고방식은 아니다. 체력이 강한 남자, 멋지다.
커피도 마셨으니 유니온 스퀘어로 가자.
뉴욕 건물의 벽은, 다양한 홍보 매체였다. 만일 배트맨 포스터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부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시선이 멈추어 볼 수 있는 장소엔 빠짐없이 홍보물이 게시되어 있다. 내가 아는 옥외 광고란, 건물 지붕 위나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진 매체들이다. 건물 창을 가리기 때문에 적용이 안된 건가 싶기도 했다. 정신이 없어 보이지 않았는지, 옥외 배너의 위치로는 적절하다 생각이 든다.
’ 보고 싶다, 미국 극장에서... 아! 자막은 없겠지만...’라고 위시리스트를 업데이트한다. 자막 없는 외국 영화 보기. 난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액션 영화이니 별 무리가 없을까? 자막을 읽다가 장면을 곁눈으로 보는 일이 많다. 극장 스크린의 경우 우측 혹은 아래에 자막이 있으니 글을 읽으며 장면이 눈에 들어올 수 없다. 어쩌면 이해라는 문제를 떠나, 영화 한 편의 모든 장면을 본다는 생각이 든다. 움직이고 스토리가 있는 영상이니 영화 전체의 의미는 놓치지 않으려나?
‘2012년 올림픽 호스트 시티 선정’까지 남은 날을 역으로 카운트하는 시계다. 선정 당일,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집중 보도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다르겠는가?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에 이런 시그너처를 두는 것은 그 날까지 기대를 가지고 함께 하자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32일 20시간 28분 4초 38’. 남은 시간이다. 오며 그리고 가며 힐끗 보며 ‘아! 며칠 남았구나!’ 이런 생각을 모두 갖게 되지 않을까? 서울보다 더 다문화적이니, ‘한 마음’이 되는 것이 더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한 곳을 쳐다보고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연출. 마케팅이 별거인가? 노출된 사람들에게 '사야지'라는 동일한 생각을 심는 행위다. ‘모두 참여해 주세요’라는 말보다 더 효과적인 전달이 아닐까?
이 날 유니온 스퀘어의 컨텐츠가 괜찮았다. 뉴욕시 인근 농장에서 작물을 가지고 나와서 판매하는 Farmers’ Market이 열리고 있었다. 대형 유통 업체일수록 물량이 많고 생산지 > 집산 거점 > 각 매장의 이동 과정 중 보관(저장)은 필수. 유통 보관 시설이 아무리 좋더라도 점점 더 덜 신선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수확한 작물을 오늘 파는 Farmers’ Market. ‘우리 동네도...’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구청 앞에 주말마다 Farmers’ Market이 열리고, 인근 농가에서 수급한 상품이 대형 마트 매대에 놓이지만.반응형LIST'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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