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9. 23:48ㆍ지난 글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라는 행위, 마음은, 역사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행위 혹은 마음이다. 그를 위해 자명고를 찢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사, 나라를 사랑하여 다시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뛰어간 역사, 내가 정한 반려가 어엿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 바보 온달을 온달 장군으로 만든 역사.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랑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좋아하면서 왜 사랑한다고 말을 할까? ‘첫 눈에 좋아하게 됐어’를 왜 ‘첫 눈에 사랑하게 됐어’라고 말할까? ‘첫 눈에 사랑하기로 결정했어’가 올바른 표현인데.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일까, 다른 의미일까? 2019년 9월 현재, 같은 의미로 마구 사용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서로 좋아하는 사람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잖아. 그러니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의무감에 억지 춘향인 마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나타난다. 상대가 옆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떨리고 홍조가 얼굴에 물들이며, 한 시라도 떨어지기 싫어한다. 좋아해서, 자신이 해주고 싶은 일을 하고, 주고 싶은 물건을 준다. 항상 머릿속에서 상대가 사라지지 않고, 전화는 기본 20분 이상이다. 말의 내용이 중요한 것보다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 소중하기까지 하다. 그가 옆에 있어서 그녀가 옆에 있어서 난 행복하다. 내가 옆에 있어서 그(녀)가 행복하다.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자는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더 나아가 ‘좋아함’과 ‘사랑함’은 이질적인 감정이라고까지 단정한다. 왜 이렇게 단호한가? 왜 이것을 문제 삼는가? 우리는 지금 행복한데.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서로 행복을 느끼면 되는 것 아닌가? 진실로, ‘좋아함’과 ‘사랑함’은 다른 의미인가?
이렇게까지 반론을 제시한다면 잠시 말을 멈춘다. 상대는 필자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가? 그런데 그것을 도마 위에 놓고 ‘이건 머리, 이건 몸’하며 해제하여 분리 구분하려는 필자의 행위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감정의 표현 언어를 굳이 문제 삼는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사람이니 영원할 수 없다’는 변명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제대로 사랑하여 상대에게 행복을 전한 기억을 남기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던 연인이 서로에게 얼굴을 붉히며 저주만큼 잔인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물질적인 공유물들에 ‘네 것과 내 것’의 경계선을 그리며 또 저주하고 악담한다. 나중엔 사람 볼 줄 모르는 자신을 원망한다. 죽고 못살 정도로 떨어지기 싫었고, 좋게 느껴지는 것을 상대에게 권하며 상대의 웃는 모습에 기뻐하던 사람들이 서로 저주를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했구나.’
인생에서 사랑 한 번 하지 않은 것이 무슨 문제인가? ‘난 죽을 때까지 좋아해 봤어‘면 된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사랑,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좋아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좋아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좋아하지만 다가갈 수 없고. 이것도 인생이다. 그러니 의무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거짓임에 분명하다.
이슈는 헌신이다.
A가 B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A는 B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A는 B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대가 없이 B의 행복을 위해, 가능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B를 행복하게 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B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A는 B를 만나기 전의, B가 보내온 시간은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사랑한다‘란, ’상대를 귀하게 여기고 상대가 행복하도록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라는 의미이다. 사랑은 단방향의 헌신이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B가 곁에 없어도 A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 B가 A의 생일을 챙기지 않아도 A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힘에 겨워 주저앉을 수는 있어도 상대를 저주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곁에서 물러날 수는 있어도, 상대 때문이라며 원망하지 않는다. 왜? 내가 상대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에는 통찰력이 필요하긴 하다. 상대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나름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아니다.
상대가 다이아몬드를 좋아해서, 혹은 람보르기니를 좋아해서, 내가 그것을 주면 상대는 행복하겠지? 이런 판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오판이다. 상대가 물질적 만족을 하는 웃음과, 진정 행복하여 나오는 미소는 다르다. 상대가 행복한 순간을 모르고 좋아해서, 웃기만 하면 자기만족이 되는 상태는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상대의 곁에 없는 것이 상대를 불행하지 않게 하므로, 상대를 피하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무척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자문해 보자.
나는 상대에게 헌신할 수 있는가?
상대가 진정으로 행복해 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나의 헌신이 상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3 가지 자문의 답이 부정적일 경우, 좋아할 수밖에 없다. 방법을 모르니 마음을 행위에 옮길 수 없다. 잦은 실수가 상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이렇게 조건과 한계, 테두리와 영역을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말, 마음에 담고 있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헌신을 해 본 사람만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즉, 사랑을 잘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하루 한 끼 밖에 먹지 못하는 빈곤한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누군가는,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부유한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왜 일까? 곁에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다.
‘실제로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 물심양면 애를 써 왔고, 그로 인해 너의 생활은 원활해졌는데, 네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야!’ 이 말은 거짓이다. 누군가를 통해 행복해진 사람은 ‘누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애를 썼는지’ 바로 안다.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행복이라도 그 중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행복하게 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다. 알고 나서 표현을 했는가는 두 번째 문제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하면, 틀어지고 싸우고 저주하고 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하다가 지칠 때 상대에 의해 원기를 보충 받는다. 따라서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좋아해서 결혼한 것을 인정하고, 틀어지고 싸우고 저주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자. 그리고 쉽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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