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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 2017. 11. 2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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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드 헤인스 / 캐롤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첫 눈에 반했다. 이것으로 상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내 전부를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타당한 의사결정인가? 첫 눈에 빠진 상대에게 다가가는 나의 모든 행동과 행위는 의사결정의 범주가 아니라 본능의 범주인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든 생각은 스토리가 평지를 달린다는 생각과, 군더더기가 없다는 두 가지 생각이다. 평지를 달린다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같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이 평지 위에 냇물이 흐르듯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의미다. 물론 스토리 내부에는 위기도 절정도 존재한다. 아마도 내 상태가 평지 위에 냇물이 흐르듯, 그 위기와 절정에 동조하지 못했음일 것이다. 그렇다고 재미없었다거나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조용히 누군가의 지난 사연을 듣는데 내 마음이나 기분이 차분한 상태가 유지된 그런 느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은, 스토리에 맞는 적절한 장면들이 구성되었다는 의미다. 사귀는 남자가 있는데, 뉴욕 타임스 사무실에서 거부 없이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을 거절하는 하는 장면도. 캐롤에 대한 질투로 마음속에 담긴 화를 여자에게 퍼붓는 장면도, 캐롤과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도,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 위해 사설탐정이 도청을 한 사실을 알고 권총을 들이대는 장면에서도 난 집중력만 놓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물론 의도는 없다.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그랬다.


    나는 스토리에 동조해 흥분을 하여 입 밖으로 여러 가지 말을 쏟아내는 인물이다. 불만이 생기면 불만을, 놀라면 놀라움을 그대로 쏟아내어 주위 사람들에게 ‘시끄럽다’는 핀잔을 받는다. 캐롤은 조용히 지켜보게 됐던 것 같다. 왜?


    플라톤이 살던 시대에 동성연애가 있었다고 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형태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이런 저런 규정을 배운다. 성문화 된 것도 성문화 되지 않은 것도. 혹은 사회 전체가 아니라 내가 속한 집단만의 독특한 규칙도 존재한다. 그 규칙 중 하나가 이성연애이다. 1부 1처제다. 물론, 재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2처도 2부도 그 이상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수의 일반 대중은 많이 가보면 불륜 정도다. 그러나 대부분 동성연애는 자연적인 질서를 이탈하는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계 곳곳에서 동성 간 결혼을 허가하는 사례가 뉴스를 통해 전해지지만 아마도 일반 대중에게는 ‘해외 토픽’ 이상은 아닐 것이다.


    나의 자녀가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이성에게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선은 손발에 힘이 탁 풀릴 것 같다. 그럼 나를 돌아보자. 난 동성에게 ‘애정’을 느낀 적이 없나? 적어도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범위에서는 ‘저놈 참 괜찮은 놈. 친구 삼고 싶은 놈’ 정도였다. 이른바 절친을 만나 교류를 갖는 것이 동성 간 있었던 나름의 ‘애정’ 행위였다.


    여기서 하나 함께 집고 갈 부분은, ‘동성연애’라고 하면 말초적 이미지를 받는다. 나와 같은 성별의 존재에게 애정을 느낀다는 정신적 이미지가 아니라 육체적 이미지를 상기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경험한, 동성연애를 반대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표현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이성 간 연애에서 육체적 교류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연애 초반부, 부끄럽고 당황해서, 혹은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도 생각되게끔 다양한 매체에서 본 것 같다. 플라토닉한 사랑이 이성 간에 존재할까? 평생을 상대의 속살 한 번 보지 못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 동성 간이든 이성간이든 육체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기분 나쁜 습관이다. 사랑은 사전에서 보면 정신적 애정에 가깝게 설명하고 있다. 


    사실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육체적 행위를 집어넣고 당연시 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다. 누군가에게 첫 눈에 반하는 행위를 ‘사랑’이라 한다. 혹은 ‘사랑을 느낀다’라고 표현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함께 있고 싶은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하면 당연히 함께 있고 싶고 닿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욕망이거나 욕구다. 그럼 사랑은 욕망이거나 욕구인가?


    사전의 정의가 절대적인 의미라 누구도 어길 수 없다 말할 수는 없다. 사전은 의미를 설명해 놓은 참고 서적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가 이성 간 연애를 올바른 것이라 믿고 그렇게 해 왔다. 그러니 이성 간 연애는, 집안에서 다른 이유의 반대가 없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성 간 연애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대상이 이성이면 사회적으로 무리가 없다가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즉, 애정은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다, 마음속 어딘가의 스위치가 켜지면.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필자로 사회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생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겠다.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됐든 애정을 느끼는 감정은 자연적인 감정이다.


    캐롤을 보면서, 막무가내인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화가 나서인지, 캐롤 커플의 자연스러운 애정을 보편 사회가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다. 싫은 것에 대한 반사적 감정인지도 모른다. 싫거나 악하다 판단되면 튕겨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니까.


    우리는 자손을 남기기 위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좋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내 한 몸 불사를 수 있다 생각하니 사랑이라 하는 것이고, 남은 인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반려로 삼아 함께 걸어가고 싶으니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주위에 알리고 가정을 구성하는 것이다.


    동성 간 사랑과 결혼에서는 타고난 신체적 한계로 자손을 만들 수는 없다. 아마도 자신의 사랑액과 이성의 사랑액을 합해 인공적 방식으로 자손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커플 두 사람만의 자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손을 얻고 싶고 자손에게도 사랑을 쏟고 싶어 자녀를 갖는다. 입양하는 경우도 있다. 가정이라는 형태에 대해 동성 커플이나 이성 커플이나 ‘부모와 자녀‘라는 가장 기본적 구성원에는 동의하나 보다. 아니면 나도 자손이 아니라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에 익숙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제하고 삭제하고 제거해 왔다. 때로는 제노사이드도 서슴지 않은 권력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몇 천 년 동안, 몇 만 년 동안 인간 사회를 이어왔다. 국경이 바뀌고 국가의 구성이 바뀌었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을 계속 지속해 왔다. 자손을 낳아 이어왔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시간을 내어 위로 밟아 올라가 보면 중간 중간에 단절을 경험하는 사회도 많을 것이다. 현행 지구 상 모든 국가의 역사가 몇 천 년, 몇 만 년이 아니듯.


    지구의 선조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성 간의 결합을 당연한 규칙으로 구성해 지속해 왔다. 만일 동성 간의 결합도 인정했다면, 지구는 멸망했을까?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보편적 이성보다, 나를 이해하는 특별한 동성이 캐롤의 인생에는 테레즈의 인생에는 더 적합한 것은 아닐까? 동성 간 결합도 연애도 경험이 없고 천성적으로도 동성 간 연애를 바라지도 않은, 사회 보편적인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충족될 때까지 적합한 반려를 찾는다. 


    동성의 절친만 있다면 비혼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 사회의 배제와 삭제와 거부의 전통들. 세가 갖추어지면, 그 집단의 가치관과 판단 기준이 절대성을 갖게 되는 ‘절대성 획득 전쟁’의 역사. 그 과정에서 희생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 내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상대를 배제, 제거, 삭제하려는 마음은 ‘악’이다. 



    *이미지: Photo by Dan Edward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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