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리노드 / 마이펫의 이중생활
인간은 매일 끝없는 외로움에 마음 상하며 세파에 흔들리는 존재다. 나의 이름을 부르고 등을 토닥이며 가끔 허그를 하는 그 많은 사람들로 매일 마음 따스할 것 같지만, 퇴근길 귀에 이어폰을 꽂는 나는 혼자다. 나의 이름을 살갑게 불러주는 이는 많지만 마음은 비어만 간다. 매일 열심과 성실을 다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할 뿐, 앞으로 나아갈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일을 달성하고 나서도 칭찬과 격려는 없고 당연한 결과로 치부된다.
일상을 쫓아다니느라 숨이 가픈 우리는, 작은 기쁨으로 생활 건조를 조금씩 밀어내며 살고 있다. ‘평범한 삶’이니, 다시 말해서, 고난과 만나지 않는, 가능한 만나지 않는 ‘길’이니까 안정된 생활이라 할만 하다. 위험하지 않은 덕분에 성취의 열망도 없다. 하지만 빛이 나지 않는다 하여 그 ‘안정된’ 길을 걷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 이런 존재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반려들도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같은 집안은 유사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일상 속에서 내리는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전자 내 사고방식도 포함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슷한 삶을 살더라도 각자의 마음 모양은 다르다. 그 다른 마음, 그 개별의 캡슐 속에 들어가서 우리는 가능한 안전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그 1인용 캡슐들이 모여 부딪히는 곳이 세상이다.
캡슐 속 생활은 외롭다. 충만함을 느낄 만큼 마음이 채워지는 일이 없으니 언제나 허하다. 나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상대도 마음이 벅차 터질 듯하지 않다. 언제나 다르고 언제나 부딪힌다. 말이 통하는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SNS에서 만난, 마음에 드는 포스트에 덧글을 달아도 메아리는 없다. 페이스 북 빨간 풍선이 떠 있어 반가운 마음에 클릭을 하니, 내가 덧글을 단 포스트에 남도 덧글을 달았다는 소식이다.
동종의 반려와 어울리지 못하는 우리는 이종의 반려를 찾는다. 방울토마토는 신기하게도 물만 주어도 자란다. 내가 한 행위에 성장으로 답한다. 어느 정도 자라면, 화분으로 옮겨 키우면 된다고 한다. 커피를 마실 때 눈을 맞추고, 먼지를 닦고, 매일 아침 물을 준다. 정기적으로 햇살 아래 내놓는다. 가끔 대화도 한다. 한데, 집 안 데이트 이상은 어렵다.
골든리트리버가 마음에 든다. 그 순한 눈빛과 부드러운 갈색의, 더도 덜도 없는 몸매. 언제나 미소가 가득한 그 얼굴. 덕분에 운동도 할 수 있겠다. 집에 돌아오면 나와서 반겨 줄 것이다. 안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처음 동물 병원에서 만났을 때의 그 다정함이란. 아침이면 내 손을 혀로 핥는다. 언제나 웃으며 나를 맞는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밥을 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듯 먹는다. 살가운 스킨십으로 미소가 왕래하는 인사를 나누고 직장으로 향한다. 이런 모닝 미소를 지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 골든리트리버와 일과 시간 동안 헤어지는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상을 쫓고, 중간중간 리트리버의 사진도 보며 최선을 다하는 하루를 보낸다. 녹초가 되어 현관을 연다. 꽤 늦은 시간인데, 내 발소리를 듣고 현관 앞에 꼬리를 흔들며 그 자리에서 맴돌며 나를 반긴다. 동종 반려는, 자신의 일상에 지쳐 잠들어 있다. 원망할 수 없이 그 사람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외롭다.
이 애니메이션은,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반려와의 관계에서 필요악인, ‘일과 시간 동안, 나와 헤어진' 나의 절친 이종 반려의 숨겨진 생활을 그린 모험 활극이다. 어디 가는 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밥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 하루 온종일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 외로운 시간을 연속극에 마음 졸이고, 영화로 상상에 빠지며, 반죽기로 안마를 받는다.
심장도 안정을 취하는 별 탈 없는 생활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종 반려인 그녀가 유기 센터에서 내 친구라며 덩치 큰 녀석을 데려온 것이다. 영역 분쟁이 일어났다. 그 좁은 아파트 안이 강아지 때부터 살았던 세상의 전부였는데. 분쟁 속 집 밖으로 나오게 된 그의 앞에 자신의 영역보다 몇 백만 배 넓은 뉴욕 시티가 펼쳐진다. 심장이 쫄깃한 순간들이 쉴 새 없이 다가온다.
위험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분쟁 상대였던 동종 반려와 친구가 된, 그 스펙터클하고 어드벤처 가득한 하루가 지났다. 조금 성숙해진듯하다. 세상을 전보다 많이 안 듯하다. 진짜 세상이 어떤지 그 일면을 본 것 같다. 마음이 그만큼 넓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려는 자신의 이종 반려를 마중하기 위해 현관 앞에 턱을 쳐들고 다시 앉는다.
인간만이 거주하던 도시에, 식물과 동물이 반입됐다. 거친 자연과 분리하여, 안락함과 안전함을 꾀하고, 원활하고 합리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자연 발생적 혹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도시에 자연이 반입됐다 하겠다. 하지만 유입 자연은 인테리어 구성요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가구나 쇼파와 다른 점이라면 생각하고 움직이며 내 말에 동조하면서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즉, 당연하고 옳은 말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따스한 피가 흐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공적 공간에서 자라고 있는, 자연이라기 보다 반입 존재들이 내가 속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곁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롭다는 것이다. 나의 이종 반려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생명들인가? 적어도, 무생물의 인테리어 구성요소와는 대우가 달라야 할 것이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동종 반려만큼의 애정 담긴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나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나의 동종 반려에게 나는 과연 얼마나 애정 담긴 행동을 했나?
필요악의 시간에 나의 이종 반려들이 자신의 동종 반려들과 함께 있을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가성비가 좋아 부담이 되지 않을 수준이라면 더 좋겠다. 그러면 저녁에 서로 반갑게 만나 함께 지낼 수 있을 텐데.
*이미지: Photo by Matthew Henr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