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를 물어보길 바라지난 글 2017. 12. 9. 14:19728x90반응형SMALL
한강/채식주의자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190 p)
이젠 과거의 울림일 수 있는 이런 말들. 아직도 현실은 이런 느낌인지 싶기도 한 이 말. 세상 사람들은 최근 독서나 현자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말 옳은 행동과 마음을 TV 예능을 통해 혹은 강연을 통해 가지게 됐다는 의심. 여전히 이런 말이 떠돌고 있다고 믿는 그 작은 상처들.
경험으로 축적된 문제를 해결하는 어쩌구니 없는 해답들, “이런 현상은 이렇게 처리하면 돼.”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금언이 틀리는 경우는 해답을 말하기 전에 생각에서 생략된 부분 때문이다. “‘이런 원인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이렇게 처리한다”와 같이 우리는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을 잊고 현상만을 바라본다.
세상 사람들은 편리하게 사는 법을 그 동안 생존을 이어오며 체내에 축적한 것 같다. 첫 번째는 분류하기. 이런 특징은 A 그룹, 저런 특징은 B 그룹. 만나는 존재나 현상을 시각으로 감지하고 이런 특징을 가지면 A 그룹으로 인식하고, 저런 특징을 가지면 B 그룹으로 인식하고 대상에 대한 확정된 인상을 정한다. 빠르게 변화하고, 밀려는 수많은 일을 제시간에 처리하고자 할 때 삶의 능률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빠른 분류이다.
여기에 후속되는 작업은 이름 붙이기. A 그룹에 속하는 존재 혹은 현상에 분류 명을 붙인다. 그럼 다른 현상이나 속성을 ‘확실히’ 보여 주기 전에는 그(녀)는 혹은 그 현상은 명칭 변경의 혜택을 얻지 못한다.
이런 분류와 명명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변하기 때문에 무수한 그룹과 무수한 이름들이 만들어진다. 사실 따지면 몇 개 안되는 그룹과 이름의 반복이지만, 그런 건 관심을 갖게 된 학자나 할 일이다. 내가 분류하거나 남의 분류를 인정함을 통해 인식된 존재 혹은 현상에는 더 이상의 고민 과정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사하더라도 차이가 인식되면 다른 명칭으로 분류되어 수도 없이 그룹과 명칭이 생겨난다.
하지만, 나름대로 ‘불변의 기준’도 있다. 내 주위 100명 중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기준은 꽤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존재 혹은 이 현상을 C 그룹 c15라고 인식한다. 오호 그럼 나도.
그러다 보니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과정도 순식간에 일어난다. 가족도 이 분류와 명명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녁이면 피곤한 몸에 대화도 귀찮은 하루하루. 아니, 귀찮음을 느끼기도 전에 남자든 여자든 자신만의 휴식용 굴로 들어가는 요즘, 문제아 A가 오늘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길, 퇴근하며 들어온 현관에서 느낀 아우라로 판단하고 (씻고) 잔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아이 교육을 잠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사실 교육이란 적분 공식이나 은유법 혹은 가정법이나 to부정사, 민주주의나 우리나라 근대사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생각되고 있는 교육은,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 파티에 참석해서 대화의 대상을 선택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 학교에서 친구들로 인해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슬기롭게 처리하는 방법, 어른에게 제대로 이야기하고 인사하는 방법 같이, 지금 하는 일, 일과 생활과 연관된 대인관계와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 부부가 주목한 것은, 생각하는 습관, 깨달았을 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 부부가 지금껏 홀로 익혀서 겨우 몸속에 집어넣은 그것 말이다. 현상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제대로가 무엇인지, 제대로 봤으면 그것을 몸에 익힐 것인지 말 것인지, 익혔다면 혹은 깨달았다면 그것대로 행동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능력이 학교 혹은 가정교육에서 생략되어 온 내용이다. 더구나 부모라는 거창하고 위대한 명찰을 단 우리들이 평생 동안 배우고 실수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것만이라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한 동안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16년의 혹은 18년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 우왕좌왕을 하며 사는 우리들이 우리 부부가 생각한 이런 교육을 받은 경우는 몇 번이나 있나? 그 횟수나 내용이 적고 많음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0대 아이를 둔 부모로써 가지게 된 걱정이다.
우리의 부모는 해방을 겪고, 내전을 겪고, 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겪었다. 대부분 전업주부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전업주부는 또한 당시에는 해체되지 않은 대가족 시스템에서 구성원으로서 생활을 하면서, 분가한 햇가족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침을 준비하고 잠시 쉬고 점심을 준비하고 잠시 쉬고 저녁을 준비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을 했다. 식사 준비 사이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한다. 아이들 숙제도 돕고 문제가 생기면 학교로 뛰어가야 했다. 그 누구도 소위 ‘교양’이라는 교육은 받아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집안의 내력이나 뼈대의 굵기와 무관하게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 바쁜 시대 속에서도 빛을 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은 커다란 사건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깨닫기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리저리 짜 맞춰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었다. 왜 갑자기 진저리 치도록 고기가 싫어졌는지 가장 먼저 본 ‘가족’이 물어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 많다는 박사들과 같이 상의를 했다면, 과연 성질이 불같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고기가 입에 쑤셔 넣어지고 결국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는 가족상잔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기가 몸에 좋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현상을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사회 공통적인 상식(?)에 맞춰 그녀에게 ‘고기를 먹어야 하니 먹어’라고 말하며, 성격이 급한 ‘가장’이 그렇게 손을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이다.
그 성숙되지 못한 현실 대응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그 부인, 그 틈에 예술혼을 불태운 형부와 나무 같은 언니, 그리고 내가 편해서 결혼한 남편으로 인해 순식간에 찰나의 순간에 비정상 인간이 되어 어린 시절의 몰이해를 반복해서 경험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육체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언어폭력이다. 휘두르는 사람이 ‘자기 할 말을 한 것이고, 뭐가 잘못 된 곳이 있냐?’는 그 말의 폭력성 말이다. 우리는 법의 기반 위에 철인정치의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법에는 육체적 폭력을 제어하는, 다시 말해서 육체적 부상을 제어하는 법은 제정되어 성문화 되어 있지만, 마음에 부상을 남기는 언어폭력에 대해서는 ‘명예 회손’이라는 얄팍한 내용만을 성문화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법을 제정한 그들은, 언어폭력을 겪지 않았거나 ‘폭력’으로 인식될 정도로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법에서의 언어폭력은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괴로움을 경험하고, 심하면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언어폭력은, 16년 혹은 18년간의 ‘교육’ 내용에 기반하고 있어 그 내용은 정확한 정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누구도 그렇게 배웠으니.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배운 내용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이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경험한다. 때로는 좋아요를 클릭하지만 때로는 ‘싫어요’를 클릭하고 싶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슈는 ‘좋아요’를 클릭할지 ‘싫어요’를 클릭할 지가 아니다. 80억 사람들이 사는 지구에는, 한 나라의 경계선 안에도 인구수만큼의 삶의 모습이 존재한다. 표면적 이해층에서는 아는 내용이다. 그러나 상식 밖의 생활 모습에 대해 우리는 심층적인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도 낯 설어서 혹은 너무도 이상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즉, 이해할 수 없다. 이해가 안되는 현상을 내 가족이 보이고 있으니 당황한다. 당황하니까 원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족 외 사람들에게 어떻게 분류될 지에 대한 걱정에 상식이라는 잣대를 가져온다. 그리고 “너의 현재 행동은 이상하니 고쳐!”라고 판결한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이해한 사람들의 수는 언제나 소수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다수결의 원칙은 상식을 정하는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소수는 언제나 공익적 측면에서 상식에 따라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비난이라도 면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세상을 바꾸는 뛰어난 생각이 소수에게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앞의 소수가 단지 다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수를 따라야 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채식주의자들이 예능에도 뉴스에도 그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설 속 상황에 이러한 세상의 소식들이 전해진다면 여인은 비난에서 벗어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출간되면 중쇄되기 전에는 보완되지 않으며, 보완되더라도 그 이야기를 틀은 뒤집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안타까워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Josh Applegate on Unsplash
반응형LIST'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강한 일상, 과학자들이 알려준다 (0) 2017.12.15 스크램블드 에그의 또 다른 이야기들 (0) 2017.12.13 자유는 달고 책임은 쓰다 (0) 2017.12.04 크리스마스 아침 식사로 뭘 먹지? (0) 2017.12.03 익숙한 생각, 익숙하지 않은 행동 (0) 201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