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론

2018. 1. 12. 07:04지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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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감성’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예전 책이긴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구립 도서관에서 빌렸다. 포털에 게시된 이야기 중 이 책을 언급한 글을 읽었고, 급하게 흥미가 끌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하루키의 글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신수정 문학평론가가 하루키에 대해 이야기 한 내용 중 ‘무국적성’과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말을 언급했을 때, ‘감성’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무국적성’이란 단어보다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단어에 닿았을 때다. 왜일까?


신수정 평론가는 ‘...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존재의 무거움’이라고 썼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라는 제한된 세계에 동의한다기보다, 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살게 된 삶’에 동의한다. 그 무게를 들고 자신의 수명만큼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느낀 무거움에 생각이 닿았다. 그 무거움을 이겨내는 수단이 ‘감성’이다.


겨울이다. 언제나 예전 최고 추위를 경신하는 그런 날들이다. 그 건조함이 잠시 마음에 여백을 만들었다. 낮이었다면 음악을 틀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건조함은 빨래를 말리진 못해도 피부의 수분은 앗아간다. 그 수분과 함께 일상의 일들도 함께 뇌에서 날아간 듯하다. 마음은 뇌에 있다고 생각한다. 뇌에 여백이 생기는 순간이 마음에 빈 곳이 생기는 순간이다. 빈 곳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빈 곳을 채우려 한다. 그렇게 무거우면서도 빈 곳이 보이면 채우려 한다.


‘감성’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린다. 


‘감성’이라는 단어는, ‘여린 감정’이다. 촉촉이 젖는 속성을 가졌다 생각이 들자 여성성이 느껴진다. ‘감성’은 ‘진한’ ‘끈적한’ 속성도 가진다. 감성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그만큼 ‘감성’은 진한 속성을 가졌다. 송두리째 빼앗기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끈적하다’. 


커피는 추운 겨울에 마시지 말라고 한다. 이뇨 작용이 있어서 몸의 수분을 배출한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는 어느 정도의 수분이 몸에 유지되어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 나는 감성에 젖게 되면, 늪에 빠진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커피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약간의 감성을 커피로 들어내어 일상과 감성에 빠진 마음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감성은 ‘아련’한 맛이 있다. 아픈 추억이 떠오르면, 당시 그대로가 아니라 미화된다. 미화된 아픈 추억은 아련한 맛이 난다. 그때만큼 아프지 않고 아련하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애정’과 ‘상처’가 뒤섞여 쌉쌀한 아련함으로 변한다 생각이 든다.


이런 아련함의 계기는 ‘음악’이다. 내가 가진 버릇은, 창작자들에게 상처가 되는 버릇이다. 새로 나온 신곡 중에서 먼저 좋아하는 가수들의 신곡을 재생 목록에 넣고, 그다음으로 처음(?) 만나는 곡 중 시선을 잡는 음악을 재생 목록에 넣는다. 그리고 재생되는 과정 중 첫 1분 혹은 절반에 이를 때까지 감동이 없으면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이런 내가 ‘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가수들은 내게 감동을 준다. 가사이든, 멜로디이든, 혹은 리듬감이든, 음악이 가진 요소 중 일부 혹은 전체가 나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내게는 감각 휴식 기간이다. 일상에 쫓기거나 일상을 쫓거나, 때로는 자랑스럽게, 일상을 주도하는 나는 온 신경과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혈관을 넓어져 혈액 이동 양이 늘고 체온은 상승한다. 활도 시위를 이완시키는 순간이 없으면 늘어나 못 쓰게 된다고 한다. 나에게 이런 감각 휴식 시간은 나를 이완시켜 다시 뛰게 재충전하는 시간이다. 


감성을 불어 일으키는 음악은 많이 만나봤다. 그렇다면 ‘단어’는 어떨까? 어떤 단어를 만나면 나는 감성에 빠질까? ‘첫사랑.’ 마음이 아니라 가슴 한견을 찌릿하게 만드는 단어다. 첫 사랑이 있다는 것은 두 번째 사랑도 존재한다는 의미다. 두 번째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첫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루지 못한 바람도 아련함을 주는데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아련함의 크기도 가장 크다. 지금은 애잔함으로 바뀐 첫 사랑의 기억은 나에게 감성을 대변하는 대명사일지도 모른다. ‘미래.’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모두 감성을 일으키는 단어이지만, ‘미래’는 조금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과 궁금함이 마음에 빈틈을 만든다. 더구나 미래에 대한 ‘바람(hope 혹은 wish)’이 있다면 감성이 생겨나는 속도는 향상된다. ‘미래’에 대해 나는 항상 약자적 입장을 취한다. 내가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자가 된 나는 여린 감성에 빠져든다. 약자가 됐다, 그 상태가 됐다고 느끼면 마음 한 곳을 감성에게 내어준다. ‘두려움’이나 ‘궁금함’에는 열정으로 마음을 채우지만, ‘바람’에는 감성으로 마음을 채운다. ‘하고 싶다’와 ‘받고 싶다’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의 바람이 동시에 생기기 때문에 ‘하고 싶다’와 ‘받고 싶다’가 출발한 지점에는 빈틈이 생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출발하면서 주위 공기를 많이 가지고 가기 때문에 그 출발점은 언제나 빈틈이 된다.


‘열정’과 ‘감성’은 두 가지가 겹치는 교집합 부분을 갖는다. ‘열정’과 ‘감성’이 생기는 때가 내 마음에 빈 곳이 생겨난 때이다. 그런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열정’은 열기를 채우기 위해 마음을 강제로 비우는 느낌이 드는 반면, ‘감성’은 마음의 벽 중 일부가 지침에 헐어 채워져 있던 내용물이 누수되는 느낌이 든다. 얻으려 열정을 불태운 사랑보다 부지불식 중 젖은 사랑이 더 기억에 남기 때문은 아닐까?


‘감성’에 젖은 사람은 인간미가 있다. 나는 인간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감성의 크기만큼 사람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인간미가 반드시 주위에 사람을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성은 규칙으로 운영되는 기계적 시간을 비집고 들어와 내가 인간임을 깨닫게 해주는 비타민은 아닐까? 인간임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몸에서 힘이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 될 때가 있다. 인간임을 떠올리지 않고 근면과 성실로 부여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사고 없는 ‘행복’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성이란 윤활유가 필요하다. 아마도 내가 그리 빡빡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서는 살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인생에는 음악, 문학, 커피, 영화가 가끔 필요한지도 모른다. 소울 푸드처럼 순간 떠올라 잠시 일상에서 한 발 비껴 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삶의 무거움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Erik Lucater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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