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남긴 포스트 1

2018. 2. 1. 11:54지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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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블로그


내게도 힘든 삶(살아감)에 대한 이야기를 딸에게 한다.


나에게도 인생은 어려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어려운 시간임에 틀림없다. 누구도 같은 시간을 두 번 사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실수는 당연한 것이다. 천재든 둔재든, 인생에서 한 번의 실수도 범한 적 없는 사람은 없다. 행동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결정한다는 전제하에, 행동의 결과가 성공인지 실패인지, 실수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실수담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으려면, 아마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더 적은 시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아니, 더 이상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의 결과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딸에게 남긴 포스트는, 딸이 평생 보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지 모른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내가 블로깅(blogging)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가르쳐줘!”라며 자신의 블로그를 만들었다. 주로 관심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적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블로그(blog)를 봤고, 서로 이웃을 맺었다. 다시 말해서, 딸아이가 내 블로그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볼 수 있는 길은 이미 마련된 상황이다.


두 번째 든 생각은 ‘이해할 수 있을까’이다. 딸아이와 나는 정확히 36살 차이다. 나도 개띠이고 딸아이도 개띠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태어난 후 출생 신고를 하면서 알아차렸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니, 문장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이해’의 문턱에 발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딸아이가 단어나 문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내용의 의미가 살에 와닿아 자신의 인생에 반영할 수 있다 자신할 수 없다.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경우에도 타인의 삶을 글로 본 후에, 그가 처했던 상황, 그 당시의 심리 및 물리적 상황 등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1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딸이라도 지금 나의 포스트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을 간접 경험 삼아 자신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반영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딸에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살아야 돼!’라는 지시를 딸에게 남기지 않는다. 이해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기 때문이 당위적 맺음말로 문장을 완결하지 않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이의 인생은 결코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유전자를 공유한 가족이라도 사리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성공한 이의 사례를 보

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적용하더라도 그 답이 될 수 없음을 제시하겠다. 딸은 나에게서 절반의 유전자를, 아내에게서 절반의 유전자를 받았다.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은 딸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볼 때면, 이래저래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

나 그것은 잔소리일 뿐이다. 나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 한다. 잔소리가 가져오는 심리적 정신적 충격을 뼈 속 깊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행동’을 직접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미 지나버린 나의 행동을 포스트로 남겨 보게 하려고 한다. 또한 영화, 책, 혹은 음악을 소재로 하여 적어 나갔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사는 과정에서 이렇게 변했다. 그러니 너는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 보렴’이라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800여 편의, 그리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는 포스트의 일부에 지나지 않다. 아빠의 과거 혹은 생각을 ‘읽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할 기회를 갖게 하려는 의도다. 이 안에는 단지 일상의 일들만 적혀 있지 않다. 다양한 화제를 언급하고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자기 자신, 사회에 대한 것이지만, 비단 그러한 범주에 국한된 글은 아니다. 더욱이, 이 글들을 모아 출간하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감히 주제넘게 내 딸에게 준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세상의 딸들이 내 아이의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내 글을 본 세상의 딸들 중 내 아이와 친구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염려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딸아이가 내 포스트를 보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상의 딸들 역시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가능성을 두고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웃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세상의 딸들은 자신의 부모와 소통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혈연의 관계가 보여주는 사례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 황당하고 가공할 상상의 뒤에는, 친구가 될 가능성과 더불어, 세상의 딸들이 혹시 내 글을 계기로 긍정적 삶을 산다면, 그래서 우리 아이가 속한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하는데 힘을 더한다면, 이는 친구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일 수 있다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상상에 공상을 더해 본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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