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5. 11:07ㆍ지난 글
‘저런 면이 좋아’
그때 그때 참 많은 이유가 떠오른다. 상대를 사랑하게 될 이유가.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충동, 혹은 호르몬의 발현. 마치 위험한 상황에서 옆에 있는 이성에게 끌리는 것과 같은 상황. 상대의 매력에 불안정한 마음이 되고 그것이 마치 위험에 처한 상황과 동일해져 매력을 느낀 이성을 ‘저 사람만 있으면 돼’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일 수도.
결국, 나는 나를 모르고, 나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따라서 나는 나의 반쪽을 알아볼 눈이 없다. 눈이 없으니 방황하게 되고 방황하니 상처만이 남는다. 외로운 하루하루, 나의 짝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 방향성이 잘못된 탓에 상처만 남겼다. 오히려 그들에게 쏟은 잠시의 정성이 그들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에 이별은 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연애란, 결코 혼자 할 수 없는 것이라, 이별은 당사자 두 사람에게 가리지 않고 상처를 남긴다. 이별은 연애 구성원의 애정의 크기에 비례한 상처를 남긴다. 더욱이 그 연애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짝사랑도 관여되고, 다른 이의 적극성도 관여되면 연애는 삼각, 사각, 그리고 무한의 각으로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들어 관련자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는 승리자의 마음에도 상처뿐인 영광을 남기며, 더욱이 그렇게 이루어진 애정에 두 사람만 남아 마음이 냉정을 찾게 되면 가장 큰 상처가 폭발하듯 생긴다. ‘결국 이 사람은 나의 반려가 아니었어.’
인간의 눈은 앞만 보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타인만 바라본다. 타인이 해서 어울리거나 좋아 보이는 일이나 물건은 나에게도 어울리거나 좋을 것이란 오해를 낳는다. 그것은 오해로 끝나지 않고 나의 안에서 가치관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맞는 존재나 사물을 찾으려면 눈을 반개하거나 감고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앞만 보게 만들어진 눈을 막고 모든 신경을 안쪽으로, 나에게로 향하게 해야 겨우 내가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일들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고 맞나 안 맞나를 따지고 검토한다. 어쩌면 그 주마등에는 결혼한 기억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현재의 나는 총각 혹은 처녀처럼 처음 만나는 연애에 가슴 두근거리며 밤잠을 설치는 일은 두 번 다시없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알고, 그에 잘 맞는 반려를 찾으면 두 사람의 세계는 선순환을 시작한다. 그 선순환은 두 사람의 조화로 주위와도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옳은 방향성을 찾는 것만으로도 나는 반려에 향하는 편한 길을 즐기며 걸어나갈 수 있다. 걸어가며 주위 경치도 즐길 여유마저 얻을 수 있다. 삶이 너무 아름다워 감격할지도 모른다.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반려와 함께 삶을 구상하고 이를 전개한다. 그 선순환은 선순환의 모습을 보는 자녀들의 눈에도 비쳐 그 아이들도 자신에게 잘 맞는 반려를 찾으려 노력하게 한다.
정말 아름다운, 누구나 바라는 삶이 아닌가? 인간은 글자를 만들어 냈다. 여러 사람들의 지혜도 전하고 오해도 전한다. 그래서 독서만으로는 올바른 길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미숙한 사람들은 오해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경험은 내 앞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거부하지 않고 그 중간을 통과하는 행위다. 경험 발생의 출발점은 그 일을 하겠다는 결정이다. 누구는 ‘나는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삶을 능숙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검토과 반성을 반복했기 때문에 사람을 능숙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갖는 함정은,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감정이다. 인간의 감정은 검토와 반성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희로애락은 내 입에 단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파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입에 달다 쓰다 맵다 짜다로 판단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게 한다.
옳은 것, 나에게 맞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절대적인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매 시간 변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외부 자극을 겪고 입에 달달한 쪽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해를 한다. ‘나에게 맞는 사람은 달콤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현재의 나에게 맞는 사람은 엄격한 선생님일 수도 있다. 남의 반려는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나긋나긋한데, 나의 반려는 나를 제약하고 억누르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보면 내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런 모양을 몸에 장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래 저래 말을 해도 결과를 보면 명확해진다.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이 당사자들에게는 평탄치 않아 보일지라도, 결과가 좋다면 그들은 좋은 반려이다. 내가 편하고 내 입에 달콤한 것이 좋은 결과가 아니다. 반려의 억제로 인해 내가 절제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낭비가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좋은 결과다. 반려가 내 행동을 막은 바람에 쓸데없는 경험을 겪을 필요가 없어 당시에는 불편했지만 마음의 상처는 남지 않았다면 그것은 좋은 결과다. 이렇게 불편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과거보다 성숙한 나를 발견하는 뒤늦은 깨달음에 눈물이 날 수도 있겠다.
인간의 눈은 앞만 보게 만들어져 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려면 온 몸을 180도로 뒤틀어야 한다. 결코 편하지 않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행위, 답답하지만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아끼지 말고 사용해야 한다, 저질러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바란다. 나 자신은 행복을 바란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방법을 버리고 입에 달콤한 것만 선택한다면 뉴욕 거리를 걷는, 그 무너진 몸매의 그들처럼 변할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안, 그 정리되고 관리된 날씬한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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