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5. 12:46ㆍ지난 글
분가는 처음이었다.
분가는 바라던 바였었다. 왜 과거 완료형일까? 20대에 들어서면서 분가의 꿈을 가졌었다.
그 전에 이야기할 것은, 2000년 여름의 일본 여행이다. 대학 1학년, 누나를 따라 동네 제일교포 할머니에게 3개월 간 일어를 배웠다.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이랬다. 히라가나와 가다가나를 외운다. 정말 오래된 교재였지만, 챕터별로 수업이 진행됐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이것은 책상입니다(これはつくえです.)’. 띄어쓰기가 없는 언어는 처음이었다. 영어는 알다시피 12년 간 배웠고 제2외국어가 독일어였다. 모두 단어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 그러나 일어는 단어 간 공백이 없다. 한 챕터에는 20개 정도의 문장이 있었다. 그 문장을 외운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구두로 외운다. 외운 다음 수업 시간에 한 문장 당 10번씩 읽는다. 발음도 체크된다.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포함해 10년이 지난 2000년, ‘나는 일본 한복판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평범한 여행을 거부했다. 분가는 나에게 ‘내가 생활비를 벌며 얼마나 오랫동안 생활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출발점이었던 꿈이다.
뉴욕에서 장기간 거주하려니 당연히 호텔이 아닌 ‘거주지’가 필요했다. 뉴욕의 대학생 중에 여름 방학 동안 귀국을 하며 비어있는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는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 한 달 $120을 내고 거주했다. 다행인 것은 유틸리티 비용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즉, 전기, 수도 등의 비용이 $120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를 쓰던 간에. 덕분에 시끄러운 에어콘을 집에 있는 동안 계속 켜둘 수 있었다. 탕에 물을 가득 담고 목욕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의 분가의 꿈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더구나 결혼한 지 2년 정도 된 아직은 신혼이었다. 기대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의 부푼 기대에 살짝 찬물을 끼얹은 일이 있었다. 새롭게 세를 주면서 내부 페인트칠을 하게 됐는데, 그것이 우리가 도착할 시간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첫날은 여관행이었다. 세인트 마크 거리에 있는 하룻밤 $180의 지저분한 방. 강아지만큼 큰 뉴욕 쥐가 나오지 않을까 우려됐다.
우리가 묶을 뉴욕 스튜디오(원룸을 스튜디오라고 했다)는 이스트빌리지 2th Avenue 3rd와 4th Street 사이에 위치한 10층이 안되는 건물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32Kg 이민가방을 들어서 옮겼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등에 짐으로 가득찬 백팩을 매고. 한 단에 20개 정도의 계단을. 스튜디오에 있던 시설(?)은 뒤가 불룩한 TV와 벾에 연결된 케이블 선, 탁자 하나, 5단 책장 하나, 물이 끓으면 휘파람을 부는 주전자 하나, 그릇 몇 개, 식기 몇 벌이 전부다. 이부자리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까지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로 했다. 뉴욕에는 아내의 이모님이 계신다. 그래서 귀국할 때 짐을 드리고 올 수 있게 하자고 합의했다. 마트에 갔다. 우리나라 대형 마트 같은 곳인데 상품은 카테고리별로 더 풍부했다. 에어매트와 공기를 넣는 전기식 모터가 모두 들어 있는 패키지를 구매했다. 차렵 이불과 베개도 구입했다. 가격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한 10만 원하지 않을까 했는데 5만 원 이하였다. 베개까지 모두. 짐은 다시 스튜디오에 옮겨두고 우리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딱딱하고 부드럽지 않은 이불, 더운물은 잘 나왔지만 조명을 다 켜도 어두운 실내. 이런 방이 하룻밤에 $180이라니. 뉴욕의 물가는 들은 대로 낮지 않았다.
스튜디오는 거실 겸 안방, 칸막이 없는 주방, 샤워 및 화장실 별도, 붙박이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앞으로 몇 달을 살 거주지를 꾸미기 시작했다. 에어매트에 공기가 차는 동안 책상은 주방과 화장실 사이에 우선 두고 주방 쪽에 책꽂이를 놓았다. 그 옆에 에어매트를 놓고 매트 위에 누워 TV를 볼 수 있도록 TV는 TV대없이 바닥에 두었다. 다행인 것은 벽에 연결된 케이블을 TV에 연결하면 방송이 나왔다. 채널도 적고 화질도 본 적없는 품질이지만 하루 종일 영어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만 취했다. 소리는 제대로 나왔으니. 매트 위에 깔개를 깔고 차렵 이불은 런더리(코인 세탁소)에서 세탁 및 건조해서 접어 두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코인 세탁소는 쿼러(25 센트)를 기계에 넣고 세탁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500원짜리 동전을 넣듯. 백팩에서 PDA와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설치했다. 옷은 이민가방에서 꺼내 붙박이 장에 넣었다. 이렇게 구성을 마치고 보니 몇 가지 구입품이 정리됐다. 파워탭, 인터넷, 식재료가 우선 필요했다. 매일 테이블 위에 10%의 팁을 주며 식사를 몇 개월 동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집 주위 마트를 찾아보았다.
우리가 주로 이용한 곳은 99 센트 스토어와 글로서리(식료품점), 그리고 마트였다. 장은 주로 톰프킨스 스퀘어 파크 인근의 마트에서, 일상 소모품은 99 센트 스토어, 식재료는 K마트와 글로서리를 모두 이용했다. 인터넷은 워너 케이블 TV에 신청하고 비용을 내면 케이블 TV와 인터넷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모뎀 겸 공유기를 준다. 파워 탭과 식재료는 마트에서 구입했다. 놀란 점은 식재료 가격이다. 당연히 미국산 소고기(당시 수입 문제로 국내가 시끄러웠다), 채소를 구입했는데 1주일치 장을 봤는데도 5만 원이 넘지 않았다. 아마도 유통 구조 및 생산 규모의 차이이겠지만 식재료 가격이 물가만큼 높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버드와이저 300ml 28개 캔이 $20. 할인 POP가 붙어 있었지만 당장 구입했다. 뉴욕은 수도물을 식수로 마실 수 있지만 석회 성분이 많을까 겁이 나서 생수도 한 박스 구입했다. 맥주 때문에 5만 원을 약간 넘었지만 이정도라면 뉴욕에서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달에 월세 포함 300만 원 정도면 약간 저축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나라도 식재료가 저렴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중국산이 수입되고 있어서 저렴한 것을 구하려면 발품을 팔면 되지만 유기농 상품이 당시 국내 가격 정도여서 ‘웰빙을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세간살이와 식재료를 구입하고 보니 비닐봉지로 나르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바퀴 달린 휴대용 카트도 구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에 싣고 다녔는데 뉴욕에서는 철저히 걷기를 고집할 생각이라 우리에게는 필수품이었다. 키친 타월, 휴지, 미용 티슈 등은 99 센트 스토어에서 구입했다. $2 정도면 모두 마련할 수 있었다. 식수도 99센트 스토어가 쌌다.
귀가를 해서 구입품을 정리하고 앉아 보니 출입문 자물쇠가 손잡이 열쇠와 체인 뿐이었다. 뉴욕이 치안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불안했다. 그래서 집 우측 건물 1층에 있는 H.Bricmart(하드웨어 스토어)에 가서 문에 설치할 자물쇠와 드라이버 등 공구를 구입했다. 일생 해보지 않던 일이라 2시간 걸려 겨우 설치했다. 당겨도 보고 밀어도 봤다. 완전히 고정되어 있다. 열쇠가 2개가 됐다. 체인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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