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9. 16:39ㆍ지난 글
오늘은 불연 듯 선풍기에 눈이 간다.
벌써 6월 중반. 한낮 기온이 30도 전후로 올라가 땀이 송송 맺힌다. 이런 상태가 되면 하는 일이 있다. 시간은 1시간, 온도는 23도, 상하 회전. 에어컨을 설정한다. 3분이 안되어 시원하고 습도 낮은 실내가 된다. 땀은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러니 선풍기에 눈 갈 일이 적다. 에어컨 가동 시간 1시간, 그리고 에어컨이 꺼지고 2시간 정도, 이렇게 3시간 동안 더위는 자취를 감추는데 선풍기가 웬 말인가. 스마트 하고 말 잘 듣는 에어컨이 제대로 일을 하는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선풍기를 간직하는 이유는 있다. 대학 입학 전까지 주방에는 환풍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튀김이나 볶음 같이 기름질을 할 때면, 또 생선을 구울 때면 환풍기를 켰다. 몇 번 청소를 해도 가시지 않는 기름때로 소음이 작지 않은데도. 세월이 흐르고 환풍기는 후드로 바뀌었다. 그러나 알고 있지 않나? 환풍기만큼 후드도 결코 냄새를 말끔하게 제거 못한다는 것을. 생선을 구울 때면 유산지나 종이 호일로 싸서 굽는다. 그렇게 생선을 굽고 나서도 ‘역시 생선 구이 전문점에서 먹어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삼겹살은 어떤가? 강한 불에 올려 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가열한 후 왼손에 뚜껑을 들고 오른 손에 집게를 들고 삼겹살을 3~4줄 한꺼번에 팬에 올려놓고 바로 뚜껑을 닫는다. 여기에 더하여, 가스레인지 주변에 신문지를 깔아 놓는다. 서투른 솜씨에 기름이 튈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기름은 그렇게 처리한다고 해도 냄새는 어찌하나? 냄새는 3시간 이상 실내에 남는다. 이 때 선풍기가 등장한다. 유리창을 활짝 열고 밖을 향해 선풍기를 강하게 튼다.
환풍기 역할이나 하는 선풍기에 오늘 시선이 간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해 오래된 선풍기를 처분하고 5만 원짜리를 새로 샀다. 10만원 넘는 제품과 5만 원짜리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바람이 나왔고 타이머도 잘 작동한다. 머리도 회전한다. 선선한 여름날 아침과 밤, 창을 약간 열고 그 앞에 선풍기를 세우고 회전시키면 에어컨만큼 시원하다. 에어컨이 내놓는 전기세에 겁이 나 효과가 있을 시기엔 선풍기를 켠다.
여름에 접어든 오늘 오후 1시, 커피가 생각났고 물을 끓여 드립을 내렸다. 드립으로 커피를 내릴 때는 항상 600 ml를 내린다. 뉴욕 체류의 잔재다. 미국의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 컵은 정말 크다. 우리나라 벤티 컵보다 높이로만 1/3 정도 더 높다. 귀국 후 내가 마시는 커피 양은 급격히 늘었다. 커피를 드립으로 내릴 때 유리로 된 서버에 내리지 않는다. 뚜껑이 고장 난 텀블러에 내린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온도를 지키기엔 충분하다. 마시는 방법으로 온도 지킴 이점을 활용한다. 드립을 한 커피로 커피 잔을 반 정도 채운다. 일이 있다면 한 모금을 마시고 일을 하겠지만, 단지 티타임이라면 10초 정도 멍하니 창밖을 본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이렇게 세 네 번 마시면 잔의 바닥이 보인다. 잔을 반 정도 다시 채운다. 이 때의 커피 온도는 처음과 같다. 커피를 새로 따를 때마다 마치 새 커피를 받는 것 같다.
드립 커피를 내릴 때 사용하는 기구들이 선풍기 같다. 캡슐 머신을 사용한 이후 드립 커피 기구 사용 빈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캡슐 커피 머신은 언제나 동일한 맛과 향의 커피를 내린다. 드립 커피의 경우처럼 들쑥날쑥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드립 커피 도구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캡슐 커피는 양이 적다. 둘째, 과정이 너무 단순하다. 즉 정성이 없게 느껴진다. 편리는 정성을 건조시킨다. 드립커피는 내가 양을 조절할 수 있다. 또한 손이 많이 간다. 물이 끓기 바로 직전 가스레인지 불을 끈다. 95도 정도가 가장 맛있는 커피 혹은 차를 내리는 온도라고 한다. 드립을 내릴 때 물줄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질 정도로 가늘게 내린다. 물 높이가 드리퍼 위 원두 정도의 높이가 되면 물줄기를 끊는다. 커피가 다 내려가기 전에 다시 물을 동일한 줄기로 붓는다. 마지막 드립을 하고 드리퍼에서 물이 다 내려가기 전에 드리퍼를 서버 위에서 치운다. 그 남은 액체가 커피의 맛을 좋지 않게 한다고 한다.
에어컨과 캡슐 커피 머신은 원하는 바를 입력하면 변치 않는 결과를 내놓는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똑똑한 비서다. 선풍기와 드립 커피는 정해진 방법대로 해도 마음에 들 때와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참 신경 쓰이는 비서다. 신경 쓰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원하는 수준의 결과를 내기 위해 쓰다듬고 챙긴 정든 비서다. 익숙해지기 위해 노려보듯 정확한지 살펴보고 닦고 넣어두는 과정을 오랜 세월 반복해서 그렇게 느끼나 보다.
나는 수첩과 펜에서 노트북까지, 편지에서 인터넷까지, 그리고 다이얼식 전화기에서 스마트 폰까지 그 과정을 전부 겪은 세대다. 디지털 세계에 산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아직은 종이 위에 만년필 펜촉이 긁히는 감각이 그립고, 케첩을 넣은 탕수육이 그립고, 냉수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에 바짝 붙어 앉던 그 시절이 그리운 세대다. 아마도 오늘 불현듯 선풍기에 눈이 간 이유는, 뜨거운 드립 커피를 마시고 선풍기로 더위를 쫓은 이유는 얼마 후면 에어컨과 스마트 폰과 노트북과 캡슐 머신 만이 세상에 남지 않을 거란 불안감을 느껴서이다. 편리한 것을 모두 물리고 불편한 옛 친구를 앞으로 당겨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붙잡고 환풍기가 돌던 그 때로 돌아가려 한 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직 아날로그 인간으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 격월간 '에세이스트' 81호 (2018.09~10) 게재
'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글쓰레드 Katina와 함께 한 바스큐 시장 여행 (0) | 2018.09.25 |
---|---|
겨울초입에서 (0) | 2018.09.21 |
살림 (0) | 2018.09.08 |
Tri State Corner(TSC) (0) | 2018.07.28 |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것 (0) | 2018.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