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f vs. parade

2019. 9. 4. 11:09지난 글

728x90
반응형

싸울 것인가, 이야기할 것인가?

*manif: (프랑스) 여성형 명사  [구어] 데모 (manifestation의 약어)

두 가지 이야기를 보았다. 하나는 소리가 있는 이야기였고, 다른 하나는 소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2005년 6월 26일, 첼시 마켓을 보고 오던 길이었다.

 


어떤 이는 10년 이상, 어떤 이는 80년 이상, 또 어떤 이는 30년 이상 한 장소에서 살아 왔다. 타인들과 어울려 살아왔다. 대인관계, 사회생활 모두 무리가 없다. 충분히 그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에게는 각자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 사정이 순식간에 ‘나’를 이질적인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이성 간의 애정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교육해 왔고, 스스로도 당연하다 생각해 왔다. 왜 일까? 고대 그리스에서도 동성애가 비일비재 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조차 동성의 이민과 어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농경 사회는 노동력의 확보가 사회 및 국가 유지에 핵심 관리 영역이다. 이는 기업 사회인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동성 간 반려 관계 형성을 부도덕한 일로 치부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설명하는데 가장 논리적인 근거는 과학적 근거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XXY’가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외모는 남성인데 여성성이 강한 존재가 존재함이 증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에서 유추 해석하여 동성 간의 애정 형성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순수한 의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성간의 관계 형성 및 반려 관계 구축이 당연시 되어오고, 이것이 마치 ‘선(善)’인양 ‘정의(正義)’인양 공인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에 맞지 않는 행위나 현상은 터부시 되고 차별의 대상이 됐으며,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로 분류됐다. 

자연적으로는 발생 가능한 일이, 인간 사회의 규칙에서는 금지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러니, 흐르는 강을 함부로 막아 터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것인가?

공격하는 자는 적이다. 그렇게 정의된다. 그러니 맞서 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그냥 놓아두고 차별하지 말며 같은 인간으로 대해 달라’는 요구를 관철하려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싸워 승리한 후 반대파를 모두 몰아내고 독야청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자’는 의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퍼레이드가 맞지 않겠나?

어느 날 한 마을 어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대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마당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요롭게 퍼져나간다. 누구나 대문 안을 들여다보고 무슨 잔치인지 궁금해 할 것이고, 누구나 들어와 만찬을 즐길 수 있다고 하면 경계심을 허물고 함께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집 주인이 심각한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풀어진 경계심에 일단은 듣지 않을까? 동의까지는 바라지 못하더라도.

내가 뉴욕에서 본 두 번째 이야기는 무언의 이야기다. 이미 뉴욕에서는 이렇게 논할 정도의 이슈도 아니겠지만, 미국 사회를 외신으로만 접했던 나에게는, 그들의 일상적 행동에 주목이 됐다. 그들은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출발지에서 도착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가 봤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원하는 옷차림으로 길을 가고 있던 일과 내가 그 모습을 주목 했던 일, 이 두 가지 사건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살던 세계(지금도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더 일어난다. “(어머,) 왠일이니?!”

비록 이 말이 들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던지는 눈길 속에는 무척 큰 소리로 이 말이 담겨 있었다. 

자기가 속한 사회 대다수가 인정하는 규칙을 어기는 것을 스스럼없이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함께 사는’ 타인이 어기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든 그 규칙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자신의 가족일 경우, 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만들려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사람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모든 규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료 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의 변화 역시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임을. 

규칙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규칙과 달라 이체를 띄는 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잘 숨기던지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의 인생’이라고 단정하고자 한다. 규칙 이외의 말은 들리지 않도록 귀구멍에 밀랍을 발라 마법을 걸어둔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고자 한다. 규칙의 태생적 목적/목표는,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어느새 규칙이 구성원의 행복 위에 놓여 군림하고 있다고 단정하고자 한다. 소위, 규칙에 얽매인 인간의 탄생이라고 단정하고자 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보다, ‘다름’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 제안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분리와 구별’이다. 그러니 ‘다름을 다름이 아니게 대우’하고자 한다면, 여러 현상 중 하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로 보는 것이 함께 지내는, 구성원의 행복을 우선하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 할 태도가 아닐까?

LIST

'지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시아의 미래는 지금이다  (0) 2019.09.05
해리 포터는 즐기면서...  (0) 2019.09.04
Project Killer  (0) 2019.08.30
늘어난 살림  (0) 2019.08.29
아쉬워도 되는 날  (0) 2019.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