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4. 11:33ㆍ지난 글
말이 통하는, 아니 조용히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바텐더가 있는 바, 조용한 미소로 날 응원하는 듯 보이는 마스터가 있는 카페, 3~4 시간 나만 있을 수 있는 공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없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 행복한 상태의 마음과 평화로운 상태의 마음은 흥분이 가라앉고 주위가 더 넓고 명확하게 보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혼자 있다고 해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지기(知己)라는 명칭이 있다. 나를 아는 이, 나를 이해하는 이라는 의미다. 이런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해 보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하나 둘 정리됨을 느낀다. 골치 아픈 문제가 정리되면 마음은 다시 차분해 진다. 어쩌면 묵은 문제의 해결에 충족감이 들어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홀로 머무는 아지트보다 지기와 함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소도 좋겠다. 홀로 있던 지기와 있던 주위의 방해는 사절이지만.
비혼을 외치며 지내던 젊은 시절에는 이기적 행복을 추구했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주의적 행복이라 하겠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법적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스스로 행복해지길 추구하는 삶. 이 때 정의한 바가 ‘행복이란 충족감이다‘이었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이 아닌, 내가 나아지고 개선되는데 필요한 것이 충족되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라 생각했다. 명예도 있겠고 금전도 있겠다. 어쩌면 좋은 사람도 내가 나아지고 개선되는데 필요한, 충족되어 행복한 요소일 것이다.
그러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전환되고 있다. 지금 정의하는 바는 ‘평화란 차분한 마음’이다. 주위가 번잡하고 혼란에 싸여 있으며 나날이 문제가 일어나도 차분히 생각하고 서둘지 않고 하나씩 해결하는 상태이다. 홀로 있는 장소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아직은 차분함이 익숙하지 않아 스스로를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해서다.
왜 이렇게 전환이 되는 것일까?
희로애락(喜怒哀樂)은 흥분과 긴장을 낳고 마음을 흔들어 차분히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희로애락의 원인을 곁에 두지 않는 노력이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주위 상황에 영향 받지 않게 되면 되는데, 이루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 상태는 나에게 좋은 상태이나 익숙하지 않은 상태, 낯선 상태이므로 몸과 마음이 전환하기 위해 반복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평화를 바란다는 것은, 나에게 평화가 필요한데 충족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바람(wish 혹은 hope)이 생긴다는 것이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이유다.
희로애락은 홀로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인 혹은 대상이 있고 서로 상호 작용을 함에 따라 발생되는 감정 혹은 심리 상태다.
최근 들어 더 그렇다 생각되지만, 태어나 사회에 발을 디딜 때까지 우리는 집안의 중심이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서는 아무래도 주목도가 떨어지겠지만 지금처럼 한 아이 가정이 많은 상황에서는 집안의 관심이 모두 아이에게 쏠린다. 웬만한 바람은 거의 충족이 된다. 그러던 것이 집 밖에서 사람을 상대하며 충족될 때도 있지만 충족되지 않을 때도 있다.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희소하다.
충족이 되지 않으니 방법을 찾게 된다. 쉽게 해결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해결되지 않으니 관련 생각이 마음에 쌓인다. 삶의 궤적에서 이렇게 쌓이는 생각들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머리 한 구석에는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에 관한 생각이 머물러 있다. 홀로 있어도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문제 해결과 학력 배경은 상관관계가 적다. 배움이 길다는 것이 지식이나 기술이 깊어진다는 의미는 되지만,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생각된다. 어쩌면 명문 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온 사람이 삶의 문제는 더 쉽게 풀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심리 관련 서적을 읽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얼른 이해하기 어려우니 이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경험을 나누어 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히려 실험을 반복함만 못하다. 나를 대상으로 심리 연구를 한 결과가 아니니 더욱더 그럴 것이다. 필자는 100인 100색, 유사할 수는 있어도 동일하지는 않다 생각한다. 따라서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명상에 관심이 높아지나 보다. ‘나는 누구인가’ 같은 철학적 고찰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는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는 시간. 티베트 싱잉볼이라도 한 번씩 치며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식도 필요하다. 문제와 관련된 정보나 지식을 모으지 않고 자부좌만 틀고 앉아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가 ‘어서 나도 해결해 줘’라고 졸라도 가장 중요한 한 문제에 집중하는 힘과 용기. 이것이 오히려 내가 평화를 얻는 방법일지 모른다.
만일 바깥일을 가져오지 않고 의타적으로 행동하라는 두 가지 규칙이 있는 집은 어떨까? 소위 ‘일상만 존재하는 집’이다.
어떻게든 바깥일은 밖에서 해결하거나 멈춰두고 집안에 들고 들어오지 않는다. 집에 와서는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행동하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이 더 있다. 각자의 방에 들어가면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이런 집은 어떨까? 나는 평화로워질까?
우리는 가족에게 많은 긴장과 흥분을 받는다. 가족이라 쉽게 떨치지도 못한다. ‘가족이니까 이해하겠지’라는 마음은 굉장히 무서운 마음이다. 혈연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이다. 그래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이웃사촌’이라는 가사도 있나 보다.
일상만 존재하는 집은 서로 매너 있게 대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집이다. 이런 집이 내가 행복에 이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배려’ 하나 만으로 가정생활 및 사회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어쩌면 배려에 익숙해지면 상대를 이해하는 역량도 성장할지 모른다. 타인을 이해하고 행하는 배려와, 알지 못하고 ‘봐 준다’ 식의 배려는 엄연히 다르고 효과도 차이가 클 것이다.
당신은 지금 행복을 바라나 평화를 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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