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27. 15:45ㆍ영화 이야기
오늘까지 마무리할 일은 오전에 완료했다.
매일 이런 저런 일들이 과제로 들어온다.
몇 분에 끝내든 몇 시간이 걸리든,
완료해도 내 업무 성과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처음엔 중소기업에서 한 명 혹은 한 부서에서 처리하는 일을,
대기업은 여러 명 혹은 부서로 쪼개어 전문화 시키기 때문에,
일을 완료해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오후에는 나를 찾는 이가 없다.
팀장도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우고 있다.
덕분에, 탕비실에 설치된 캡슐 머신도 이용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한가로이 보냈다.
이 때다 싶어 직원 식당에서 여유있게 식사를 했다.
그 다음 날은 회사 근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왔다.
며칠 동안 잘 쉬었다.
쉬면서,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서류, 폴더 등을 정리했다.
칼퇴근 하니 집에서도 좋아했다.
3일 정도 이렇게 보낸 후에야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
왜 이렇게 됐을까?
사회적으로 추방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첫째, 자신의 역량을 '보통 이정도 하지 않아?!'라고 판단한다.
자신의 상위 10 % 실력을 평범이라 착각한다.
사실, 동일 업무를 하는 사람들 중 상위에 속하는 데도 자신의 역량의 특별함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인지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일을 처리하고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쁘다.
둘째, 틈을 메우는 역할로 가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
구멍 보면 못 참아 메워 놓지만, 그 가치를 스스로도 설명 못 한다.
스스로 틈을 메우는 역할로 규정하지 않았다.
다만, 부족한 점이 보이고, 미진한 점이 보인다.
빈틈을 가만 두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귀를 막고 일만 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일하러 왔으니, 일할 뿐! 당연한 거 아닌가?’
‘일하러 왔으니 일하는 게 맞지!’라는 굳센 자기 확신은, 사실 무지에 대한 오만일지 모른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왜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까?
무엇을 전달하려 했을까?
1.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오만을 벗는다
일 하러 왔다고 일만 하는 것은 일종의 오만(傲慢)이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일 수 있고, 이 역시 오만이라 하겠다.
그러니, 자신의 논리대로, 일에 집중하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상황 정보에 어둡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인정해야 한다.
2.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가치를 파악해야 삶의 선택이 흔들리지 않는다.
일에만 매달렸다고, 칼퇴근을 한다거나 Work-Life Balance가 맞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이 중요시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현재, 자신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나?
스스로를 알게 되면,
자신이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일만 하는 바보들이 알아야 할 상식
직장에서는 일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있다.
눈을 떠라
일을 받을 때의 상황, 일을 하고 결과를 건낼 때의 상황을 잘 살펴보라.
일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전달되는 지를 살펴보라.
입과 귀를 터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라. 일 이야기든 신변잡기든. 듣는 것을 더 중시하라.
좀더 먼 곳까지 나와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소화하라
뭔가 알았다고 해서 조직에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듣고, 보고, 경험한 일들을 잘 갈무리 해 두라. 나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에 잘 펼칠 수 있도록.
모두가 환영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
사회 생활에서 성장을 인지하기 위해, ‘주위의 인정’이란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
주위 인정, 평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위의 인정을
자기 확인/모의고사 정도로 활용해서,
주위 사람들이 나를 가치있게 여기도록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평판을 쌓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자신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회는 가치가 없거나 협조하지 않을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러니 환영도 있고, 추방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인권이 중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탈이 아닌 추방의 길을 걷는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가치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량이 뛰어나도 내몰리는 것이다.
일을 잘 한다고 강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완벽해서 귀여운 구석이 없다고 파혼당한 성녀는 이웃 나라에 팔린다:
- 성녀의 시조만큼이나 완벽한 그녀. 그럼에도 그는 옆 국가에 팔려 추방된다.
- 이 이야기에는 예방, 판단 부족이 낳는 국가의 미래도 스케치 되어 있으니 한층 재미가 있다.
순식간에 치유해줬더니 쓸모없다며 추방당한 천재 치유사, 무면허 힐러로 즐겁게 살다:
- 파티 구성원의 능력을 향상하고, 부상을 입어도 바로 치유해 줬지만, 누구도 그의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필요 없다며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치유사가 아니었다.
파티에서 추방당한 그 치유사, 실은 최강인 것에 대하여
- 스스로도 몰랐다. 자신이 SSS 랭커인 것을.
착각하는 공방주 ~영웅 파티의 전 잡무 담당이, 실은 전투 이외가 SSS 랭크였다는 흔히 있는 이야기~
- 전형적인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 아닌가요?!’ 케이스. 있고 싶은 파티에서 추방 당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그 파티는 끝내 그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그가 알지 못한 것처럼.
영화
조커
- 아서 플렉은 추방 끝에 사회를 향한 분노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조커)를 창조하며, “추방이 곧 새로운 정체성의 출발선”이라는 잔혹한 역설을 증명한다.
쇼생크 탈출
- 앤디 듀프레인은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고(‘보석 같은 치밀함’), 결국 자유를 쟁취한다.
인사이드 아웃
-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이해와 회복의 열쇠였음을 깨닫는다.
굿 윌 헌팅
- 숀 박사와의 충돌·대화를 통해 “내 가치를 내가 인정하지 않을 때, 사회도 나를 귀중히 보지 않는다”는 교훈을 확인한다.
크루엘라
- 패션계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에스텔라(→크루엘라)는 ‘이단아’로 추방된 뒤, 오히려 혁신과 카리스마를 폭발시킨다.
기생충
- 상류층과의 충돌·침투 과정이 “사회가 가치 없다고 규정한 사람들은 끝내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다”는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시리즈
Arcane
- ‘언더시티’ 빈민들은 빛나는 필트오버에서 구조적으로 추방-당한 존재. 그 격차가 자매(바이·징크스)를 갈라놓고, “추방 → 분노 → 혁신/파괴”의 완벽한 실험실을 보여 준다.
테드 래소
- 잉글랜드 축구계가 “미식축구 코치? 말도 안 돼!”라며 조롱 속에 밀어낸 인물. 낯선 땅에서 ‘친절’과 ‘유머’로 자신을 재브랜딩하며, 추방이 곧 리더십 실험장이 될 수 있음을 입증.
어둠의 실력자가 되고 싶어서!
- 주인공은 애초에 ‘무명의 그림자’를 자처하며 자발적 추방 상태에 돌입. “시스템 밖에서 놀 때만, 진짜로 최강이 되는 판타지”라는 역설을 코믹·하드보일드 양쪽으로 증명한다.
진정한 동료가 아니라고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변방에서 슬로 라이프 하기로 했습니다
- 영웅 파티에서 쫓겨난 ‘서포터’가 시골 약국에서 새 가치를 찾는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 전염병 이후 ‘정상 사회’가 붕괴, 모두가 서로를 위험군으로 추방한다. 폐허 속에서 가족·도덕·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이 “추방 이후에도 인간답게 살 길은 있는가?”를 정면 질문.
브레이킹 배드
- 가난·암 선고로 삶의 중심에서 미끄러진 월터 화이트가 ‘사회적 추방’을 선택(마약 제조). “시스템이 내 가치를 인정 안 하면, 내가 시스템을 재편한다”는 어두운 귀환 서사.
소설
빅토르 위고 / 레 미제라블
- 사회·법 제도에서 추방된 장발장이 도망자→구원자로 ‘자기 규정’을 다시 쓰는 거대한 귀환 서사.
올더스 헉슬리 / 멋진 신세계
- ‘표준’에서 벗어난 야만인 존이 유토피아 밖에서 자란 이유로 내부 사회의 이질적 거울이 되며, 추방/동화의 딜레마를 압축.
프란츠 카프카 / 변신
-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순간 집안에서조차 물리·심리적 추방을 당하고, 인간 정체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해부.
가즈오 이시구로 / 네버 렛 미 고
- 태생부터 ‘장기 부품’으로 규정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장벽 뒤에서 자란 뒤, 제도적 추방의 비극을 조용히 고발.
리처드 K. 모건 / 얼터드 카본
- 육체를 갈아끼우는 시대, 주인공은 몸·신분을 반복적으로 ‘이탈’하며 “몸이 바뀌어도 나는 누구인가?”를 추궁.
김승옥 / 무진기행
- 도시에서 도피한 화자가 고향에서도 이방인임을 깨닫는 이중 소외. 물리적 귀향이 심리적 추방으로 전복되는 아이러니.
추방은 사회가 내리는 형벌이지만, 귀환은 스스로 쟁취하는 권리다.
사회가 내린 판결문엔 “퇴출” 두 글자가 찍혀 있지만, 귀환장은 내가 써서 찍는 도장이다.
남 탓 전에 내 레이더·네트워크·소화력부터 확인하자.
오늘 당신이 스스로를 ‘필요한 사람’으로 업데이트한다면,
내일 회사 문 앞 이름표는 다시 당신 이름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