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을 찾을 이유

2017. 12. 21. 10:34지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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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으로 저질렀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나에게 다른 세상을 찾고 싶다 혹은 찾고야 말겠다 라는 갈망이나 욕망은 없었다. 단지 몇 십 년을 살던 세계가 지겨웠을 뿐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고, 저녁에 앉아 있기 힘들었다. 주말은 휴식의 시간이라기 보다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가족과는 별도의 생활권에 머물게 됐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회사에는 6개월 무급 휴직을 냈다. 6개월 정도면 내 몸에서 지금 세계의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얽매고 있던 생각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다. 내가 처음 구매했던 자동차를 팔아 대부분의 자금을 마련했다. 저축 통장에 있던 저금도 전부 털어 냈다. 그래서 3개월 급여 정도의 이탈 자금을 마련했다.


New York City의 East village. 유학생이 여름 방학 동안 비우게 될 자신의 스튜디오를 미국 유학생 커뮤니티 사이트에 대여 형태로 내놓았다. 그런 스튜디오가 몇 개는 있었다. 그 중 비용 대비 사진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든 곳을 골랐다. 한화로 월 120 만원에 유틸리티 포함(전기세, 수도세 등 모두 포함). 유틸리티 포함 옵션을 가진 장소는 꽤 됐지만, 뉴욕 중심부에 가까운 스튜디오 중 가장 합리적인 가격(브루클린 등 외곽에 머물면서 발생하게 될 교통비를 '걷기'로 대체하겠다는 의지)이었다.


떠나기 전 날까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생각은 '벗어나자' 였다. 

대학을 졸업할 시기가 됐을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학을 떠나지 못했던 (스스로 필요한 준비를 하지 못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어렵게 구한 직장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번역을 4년 넘게 했어도 시각적으로 익힌 영어는 결코 회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라도 현지에서 영어 회화 역량을 쌓고 싶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나를 만나 고생만 한 아내에게 그럴 듯한 휴가를 주고 싶다.

이런 여러 가지 핑계들이 '벗어나자'라는 말로 집약되고 있었다. 2005년 5월까지.


평소 뉴욕에 대한 동경도 없었다. 사실 내가 자주 접하는 문화는 일본 문화였다. 일본어를 배우던 누나의 영향도 있었고, 좋아하는 만화들이 거의 대부분 일본 만화였었던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 나였다. 따라서 미국 문화가 나에게 무엇이었다고 모든 것을 정리하다시피 하며 가려는 것이었을까? 미국이란 나라는 외신에 나오던 나라, 콜라의 나라, 그렇게 '그냥 미국'이지 않았나? 전 재산을 다 털어가며 가고 싶은 나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난 '지금이 갈 때야'라고 생각했을까?


마치 이유 없는 반항 같은 거였다.


2005년 6월 1일은 비가 많이 왔던 날이다. 이민 가방을 현지에서 사용할 옷과 물품으로 가득 채워 32Kg을 맞추고, 둘 이서 백팩 하나씩을 매고, 웨스트 벨트 백도 챙겼다. 잊어버린 것 없는지 확인해가며 그렇게 인천공항으로 갔다. 


비행기 표는 왕복 80만 원. 고르고 골라서 겨우 마련한, 당시 최저가의 항공권. 숙소는 3개월 대여를 했다. 3개월 후에는 어떻게든 다른 방을 구하리라 생각했다(보장은 없었다; 브루클린 근처에 아내의 이모님이 사시긴 했지만).


가서 싼 옷과 생필품을 사는 것으로 계획을 하고, 최소한으로 짐은 줄였다(물론, 가서 에어매트 등 참 생각지도 않던 가재도구를 사기도 했지만). 


비는 주적주적 왔지만, 생애 처음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발을 디딘다는 흥분은 습한 기후도 쨍한 버스 속 에어컨 냉기로 마음속에서 밀어내며 마음을 다졌다. 아침 일찍 타는 비행기라 정말 눈곱만 떼고 나선 길. 여행도 아니고 무작정 뉴욕에서 6개월을 살기로 떠나던 길.


이런 여행은 마치, '내가 언제 파머를 해 보겠어' 하며 머리를 기르고 미용실에 몇 시간을 앉아 있던 그런 결심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모험이었다. 모험이란 정의와는 동떨어진 '저지름' 이었다.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일은 저지르고 보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든 그 일에 집중하게 되고, 잘 하려고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으려고, 나에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결심에 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게 되니까, 그 결과도 나쁘지 않다.


단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처럼 어그러졌고, 우리의 계산은 틀렸으며, 일정은 2개월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2개월 반의 뉴욕 체류는 나를 바꾸기엔 충분한 기간이었다. 남들이 일하러 일어나는 시간에 우리는 발품을 팔아 맨하탄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빠짐없이 걸어 다녔다. 사진도 매일 찍었다. 관광이 아니라 체험을 하려고 노력했다. 목적도 구체적이지 않았던 체험 노력이었지만, 이국의 하늘과 거리는 집-회사를 반복하던 채바퀴를 깨기에 충분했으며, 일상에서의 휴식이란 무엇인지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공원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휴식이 되는지, 공원 벤치가 얼마나 휴식이 되는지, 내가 살고 싶은 곳을 보스턴 주택가의, 햇살 가득 받던 그런 집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는 확인, 영어라는 것이 듣고 말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권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오전 11시 거리를 달리는 조깅족은 과연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LGBT의 퍼레이드는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행동일까, 미국의 식재료는 어떤 경로를 거치기에 이렇게 저렴할까, 유니온 스퀘어 한쪽을 가득 메운 Farmer Market의 식자재들은 마트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신선했다는 경험, 서울 중구 정도의 넓이를 가진 맨하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역 축제는 어떤 분위기이며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속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2개월 반 이후 귀국 비행기에 오른 나는 2개월 반 전 인천공항을 떠나는 나와 크게 다르지도 완전히 동일하지도 않은, 마음을 묶고 있던 끈이 끊어져 버린 그런 상태였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지는 못했지만, 새롭게 나를 구성할 만큼 충분히 흐트러져 있었다.


좀 더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는 나, 어제와 다른 성과를 거두기 위해 오늘의 시간을 귀중하게 여기는 나, 이런 전형적이고 원칙적인 생활 태도를 부정하지 않는 내가 되기는 했다. 단지 그 수준이 떠나기 전보다 진해졌다는 것이 2개월 반의 시간이 내게 준 혜택이라면 혜택이었다.


그 후 여행은 적어도 2주 이상, 체류가 가능한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3박 4일 정도의 여행은 결코 나를 흐트러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 현지 사람들과 같은 마트를 이용하고, 가능한 현지 음식을 경험하고, 그들 곁에서 독서를 하며, 여름밤 뉴욕 시립 도서관 뒷편 브라이언 파크의 무료 영화 상영을 즐기던 나는 분명히 2개월 반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올림픽 공원 그 넓은 잔디 밭에서는 센트럴 파크의 잔디 밭과는 다른 곳이었고, 결코 독서와 일광욕을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을날 햇살이 가득한 집도 보스턴 하버드 대학 인근 주택가의, 햇살 가득 받던 그런 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스타벅스 벤티 컵은 뉴욕의 그란데 컵 정도 였고, 커피 맛보다 우유 맛이 더 많이 느껴졌다. 숙소에서 센트럴 파크까지 1시간이 걸려 도착하던 내 '걷기'는 버스 2 정거장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 후 동네 한 바퀴를 돌며 하루의 피로를 잊는 내가 있었다. 시립 혹은 구립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 읽는 내가 있었다. 시각적으로 영어책을 공부하지 않고 귀와 입으로 영문을 중얼거리는 내가 있었다.


우선은 여기까지 였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과거 일상에 갇혀 있는 내 모습이 당연하다 여기던 생각이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내 모습이 됐다. 정말 우선은 이런 내 모습이 좋았다. 


뉴욕 체류 후 몇 개월 동안 생활비 문제가 나를 괴롭혔지만, 그 정도로 무모한 저지름이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Namphuong V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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