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6. 16:44ㆍ지난 글
겨울은 봄에 새로 태어날 것들을 위해 자리를 정리하는 계절이 아니다. 봄, 여름, 가을, 이 세 계절 동안 쉬지 못했던 모든 생명과 존재들이 쉬도록 강제로 집안에 묶어두는 계절이다. 신도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째 쉬었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분명 부족하다. 덜렁거리고 여성의 모성애와 따스함도 없다. 화장실만 여성용을 쓰지 천생 남자다. 성격은 한 마디로 칠랄라 팔랄라 한다. 타고난 부분도 크겠지만, 아무도 다듬지 않았나 보다. 아니,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다듬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꾸 눈이 간다. 행동 하나하나에 맘이 쓰인다.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각오를 한다. ‘내가 메워 주리라!’
이리저리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놈을 붙잡아 겨우 그 옆자리에 있게 됐다. 그동안의 힘듦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인간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따스해지고 포근해지는 내 마음이 너무 좋았다. 첫 마음은 사랑 빛이었다. 힘든 고개를 넘으면서 그것은 목표의 빛이 됐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았을 때의 그것은 안도의 빛이었다. 오직 옆자리에 앉는 것만이 사명이었으니 주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젠 항상 내 곁에 있다. 밤에 헤어지면 내게 전화도 건다. 휴일은 당연히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같이 살지만 않았지 완전 부부 같았다. 그녀도 나를 이해한다 생각했다. 나도 그녀를 이해한다 생각했다. 그녀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내가 할 일이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이 쌓여간다. 드디어 문을 열었구나 생각했다. 내가 매력적인 그녀의 빈틈을 메우고 있구나. 내가 그녀의 반려자가 됐구나. 그녀는 이제 더 나아질 것이다. 그녀는 빈틈이 메워져 보다 완전한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뿌듯하다 생각했다. 보람되다 생각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가 있을 곳은 바로 ‘너의 곁’이구나 생각했다. 힘든 지도 모른다.
아침 모닝콜은 당연히 내가 한다. 그녀가 지각하게 두어서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모닝콜은 당연히 그녀 집 앞에서 때리는 것이다. 그녀가 준비하고 나올 때까지 차를 닦고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지구 상 모든 남자의 공적이 되는 것이, 내 여자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라 믿었다. 그럼 그녀는 따스한 커피를 타가지고 내려온다. 뭘 해도 이쁘다. 커피는 절대 내 입맛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한 행동이니 당연히 각광받아야 할 모범사례다. 이리저리 막히지 않는 길을 골라서 달려 출근 마감 40분 전에 그녀를 회사 앞에 데려다 준다. 하루 일과를 준비하기엔 여유로운 40분이다. 그녀가 준비를 하든 말든 내 의도를 그렇다.
차는 그녀 회사 주차장에 놓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아침부터 미친 듯이 일을 한다. 그녀는 오늘 약간의 초과 근무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난 6시 칼퇴근을 하여 그녀 회사 앞에 가 있는 신사가 될 것이다. 그녀의 빈틈을 메우는데 예외는 없다. 난 항상 6시 칼퇴근을 해야 했다. 팀장님 시선 범위에 들지 않았으며, 회의 시간에도 보호색을 발휘해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할 때 믿고 맡길 대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 미묘한 경계선을 넘나든다. 오래도록 근무하며 칼퇴근을 할 수 있으면 좋다. 사건 사고는 저지르면 안 된다. 그러나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고정적인 일 하나 맡겨 놓으면 ‘펑크 없이 잘 해내는 사람‘이면 족하다. 어차피 과장 시험에 통과하면 과장된다. 꼭 1등이나 우수한 성적으로 과장을 달 필요가 없다. 의사 자격시험도, 사법 고시도, 행정 고시도, 합격 커트라인만 넘으면 의사가 되고 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고 행정부 과장이 되는 것 아닌가? 1등이나 우수한 시험성적을 거둔 사람만 의사, 검사, 변호사, 행정부 과장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운전면허 이론시험도 60점만 넘으면 실기 시험 자격을 갖게 된다.
1년이 지났다. 아직 나의 정열을 식지 않았다. 6개월이 더 지났다. 난 아직 청춘에 팔팔한 사랑 나이이다. 총 3년이 지났다. 이젠 그녀가 숨만 쉬어도 무슨 의미인 줄 안다. 그동안의 잡념 없는 노력 덕분이 아니겠는가? 일반인은 결코 넘지 못한 경지를 넘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완벽해졌나?
이젠 결혼해야지 않을까? 5년 동안 연애를 했고, 애 없고 거주지가 달라서 그렇지 부부나 마찬가지다. 명절이면 그녀 집과 우리 집을 번갈아가며 방문해 양가가 모두 가족처럼 대한다. 숨 짧고 성질 급한 친지들은 결혼한 거 아니냐며 은근히 결혼 언제 하는지 묻는다. 그러게? 우리는 언제 결혼하지? 그녀를 슬쩍 평소와 다른 눈길로 쳐다본다. ‘우리 결혼 언제 하나요?’ 하며.
배시시 웃는다. ‘아! 당연히 결혼하겠지!’ 이렇게 넘겨 집었다. 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결혼 준비를 하는 곳으로 동행을 했다. 그녀도 이 드레스가 이쁘네, 저 드레스가 이쁘네 한다. 입이 귀에 걸리다 시피 한다. 찢어지겠다. 신혼여행은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시음이 가능한 와이너리를 순회하기로 했다. 배낭여행 반 미식 여행 반으로 잡았다. 당연히 렌터카 운전을 위해 국제 면허증을 땄다. 집은 다른 용도 이지만 그녀와 내가 같이 부은 적금과 각자 대출을 더해 마련하기로 했다. 당연히 공동 명의다. 시대가 어떤 시댄데.
우리는 결혼했다. 땀나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프랑스 와이너리 순회도 마쳤고 멋진 사진도 많이 남겼다. 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레스토랑을 겸하는 와이너리에서의 식사는 아무나 가는 여행 가이드 목록에는 없는 음식들이다. 당연히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기에 충분한 사진과 경험을 확보했다. ‘아, 그녀는 완전한 존재에 얼마나 접근했을까?’
사실 이젠 관심 없다. 그녀가 완전해지든, 내가 그녀의 빈틈을 성공적으로 메우고 있든. 그녀 곁에 있고 그녀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그녀를 대상으로 항상 머리를 쓰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한 남자가 이 정도로 헌신을 한다니 그녀는 부족하지만 엄청 매력적인가 묻고 싶겠지? 그렇지는 않다. 실망인가? 아니다. 내 눈의 안경이고, 내 발의 짚신일 뿐이다. 당신이 혹시 그녀를 본다면 내가 미쳤다고 여겨질 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다. 와오! 날 닮았다. 다행이다. 코대도 내려앉지 않았고 눈도 크다. 얼굴도 작았다. 다리도 길다. 친가를 탔다. 외가를 탔으면... 그래도 내 딸이니 죽을 만큼 사랑했다. 식성도 습성도 나를 많이 닮았다.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손도 빠르다. 낯도 가리지 않아 우리 아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찡그리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어떻게 기르면 이런 아이가 되는지 묻기까지 한다. 정말 혼자 훌륭히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외가를 탄 부분이 있다. 바로 아내의 매력, 바로 그것을 우리 딸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쯤 되면, 도대체 한 남자가 이렇게 헌신을 하고 아이가 유전 받은 그 매력이 뭔지 궁금할 때도 됐을 것이다. 혹시 나도 그런 매력을 가진 여성을 만나면 잘 할 수 있을 정도의 매력일까 의문도 들었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는다. 들을 뿐이지만 너무 고맙고 좋다. 중간에 말을 끊거나 내가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조용히 앉아 귀 기울인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건 아니라며 말을 중간에 끊는다. 그리고 기억했다가 다음에는 내가 이야기한 대로 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속성이 변한 것을 아니다. 존중받는다 생각이 든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내 말을 차분히 들어준다. 덜렁이가 내가 이야기할 때면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기억한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지 않았다. 우리 남매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경청을 한다. 틀린 부분이 있어도 지적하지 않는다. 내 말 중에 좋은 부분을 골라내어 흉내라도 낸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을 기억했다가 선물을 하거나 데이트할 때 그쪽으로 인도한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부족한 내 시간에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장점 외에는 오히려 남들보다 부족한 이 사람을 사랑했다. 경청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인내심은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보다 힘들다. 그런 어려운 일을 그녀가 한다. 오직 나만을 위해.
이런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내 말과 그 속에 담긴 의도를 이해하고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내가 그녀를 위해 헌신하니 그런가 생각도 했다. 대가성인가 의심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판단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이 친구이거나 애인이지 않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귀 담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 삶에서 의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녀가 그런 존재다.
다른 부분은 일반적 수준 이하라도 이 한 가지 장점이 나로 하여금 그녀가 눈에 밟히고 귀에 밟히게 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런 사람이 내가 반려를 하여 평생 살아갈 사람이라 판단했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아내를 이렇게 칭찬하는 친구가 밉지 않다. 팔불출이라 놀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해가 됐다. 경청하는 반려자. 그렇게 상대방이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친구의 휴식시간이자 헌신에 대한 답례를 받는 시간일 것이다. 친구의 헌신으로 그렇게 행동하든 천생 그런 성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름을 알고 있지만 결코 다르니 옆에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증거, 그것이 경청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으니 당연하다. 덕분에 내 시각에서 상대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름을 인정하면 우리는 보다 편안한 대인관계를 가질 수 있다. 사람으로 인해 피곤해지는 일도 줄어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를 만난 적이 몇 번 있다. 볼 때마다 ‘하하하하’로 넘길 일이 많았다. 그런 그녀가 좋다는 그가 그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을 때 ‘웃기시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그들의 지난 시간을 들으니 그가 이해가 됐고 부럽기까지 했다.
현대 사회에서, 아니 인간이 사회를 이룬 순간부터 외로움은 모두가 짊어져야 할 멍에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그 외로움은 가벼워진다 생각 든다.
*이미지는 여기서: Photo by Rémi Wall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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