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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하지 못한 말
    지난 글 2017. 11. 13.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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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모토 테루/환상의 빛 외


    우리는 해야 할 말의 때를 놓친 곰탱이들일지도 모른다. 
    옆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망설이다가 시기를 놓친다.

    하루 일과는, 부모님이 아프거나 반려자가 아프거나 아이가 아플 때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정신 없이 처리한다. 실수로 재 작업을 하는 경우도 이로 인해 종종 일어난다. 세상에 중요한 일이 일상의 일인 것처럼 내 시간을 지배한다.  

    1주일 내내 야근과 철야, 동지애를 위한 회식 등으로 밤을 보내는 우리들. 사랑하는 이와의 소통은 전화나 문자만으로 감지덕지 해야 한다. 그 가상 통로를 이용한 대화의 끝은 언제나 "사랑해" 혹은 "보고 싶어"이다. '시간을 내지 못해 미안해', '오늘은 만날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 '힘들지? 힘내!' 등 많은 의미가 이 3 글자 혹은 4 글자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 담긴 모든 말이 전하지 못한 말들이다. 

    '네가 지난번 산 옷은 어울리지 않았어. 말하지 못해 미안해. 다음엔 확실히 내 의견을 전할게' 
    '자유로운 삶과,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삶은 다른 것이야. '공부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너의 말. '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거야'라는 섣부른 너의 생각이 결국 서른이 다 된 네가 직업을 찾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서로 대화도 적었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시간이 연애할 때보다 적지만, 나에게 당신은 인생의 보석이예요. 최선을 다하지 못해 미안해요' 
    '규칙적인 생활, 건강한 식사, 하루에 3Km를 걷는 최소한의 운동.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권하고 널 유도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네가 이렇게 표준 체중보다 30% 넘는 체중을 갖진 않았을 텐데. 엄마로서 너무 미안해' 
    '너희들과 좀 더 마음을 열고 대화했다면, 너희들을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희에게 멋진 선생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내 성과를 올리는 것보다는 '교육을 하는 선생'이란 자각을 좀 더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우리는 평소에 어떤 주제나 내용으로 대화하나?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 연인, 자녀, 부모, 형제, 자매, 친구들과. 
    우리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말을 전하나? 혹시 잔소리만 가득 담아 전한 것은 아닌가? 

    본심은 상대방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뿐인데, 표현은 엇나가지 않았나?
    잔소리란 무엇인가? 잔소리가 나쁜 것인가? 잔소리만 나쁜 것이 아니라 말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옷을 어울리지 않아!" 이것은 잔소리다. "이렇게 입어 보면 어때? 내 긴 다리가 더 이뻐 보일거야." 이것은 조언이다.

    상대를 향한 말은 상대가 듣고 나서 행복해져야 한다.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고려하고 혹은 그 말대로 따르고, 그 결과가 좋은 상황. 이것이 모두 전한 말이다.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어!" 그리고 얼마 후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니?" 
    "피아노 연습하기 힘들어 보여. 기분 전환도 할 겸 엄마와 같이 필라테스 다니지 않을래?"가 행복한 대화이다.
    물론 "필라테스할 시간이 어딨어?"라는 악받친 응답이 돌아온다면, 지금까지 난 잔소리만, 아니 상대가 듣고 기분이 나빠할 대화를 더 많이 한 것이다. 나만 변화하지 말고 일정 기간 상대와 동화될 수 있는 시도를 해 보자.

    "어제도 독서실에서 새벽에 들어오더라. 식사는 잘 하고 있니? 도시락이 차갑지는 않았어? 내가 퇴근길에 그 앞을 지나니 맛있는 밥 같이 먹자! 근처에 맛있는 밥집이 있던데!"

    잔소리에서 행복한 전언으로 변신하기 전에 우선 '상대의 상태'를 눈여겨 보고, '상대의 과정'에 녹아들어 가자.

    우리는 대화의 중요성은 자각하고 있다.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천 마디의 잔소리보다 상대를 이해한 나의 짧은 조언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먼저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소통하려는 자의 태도이다.

    '나 너에 대해 잘 모르니 이제부터 물어볼 거야'는 고압적이다. 부모나 형 오빠 언니는 상급자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의미에서는 서로 동조할 수평적인 관계이다. 피로 연결되어 가정에서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료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조직에 몸 담고 성공을 향해 함께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특정 상급자의 성공을 위해 내가 소모되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 아니다. 조직이 건강해지지 못하면 언제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홀로 지내기에 현대는 너무나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혼자 식사하는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기 어렵고, 상대가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면 우리는 개인주의를 택한다. 내가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상대가 내게 폐를 끼칠 기회를 박탈한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마음은 쓸쓸하지만 번거롭지 않다. 내 앞길만 똑바로 걸어가면 된다. 상대적으로 홀가분해진다. 

    전할 말이 없어지니 다하지 못한 말도 남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자아와 대화를 한다. 정신병자처럼 혼자 중얼거린다는 것이 아니다. 번잡스러운 주위 사람들이 없으니 한 가지 일에 좀더 집중해서 고려할 수 있다. 나에게 최적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해하고, 그것에 최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대가 지속되면 말이 필요없어 진다. 온라인에서 덧글로 표현하면 된다. 글은 '제출'을 클릭하기 전에 몇 번을 고칠 수도 취소할 수도 있다. 실수가 줄어든다.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부터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할 경우, 우리의 마음에 전하지 못한 말이 남지는 않는다. 하지만 번거로움을 피해 혼자 사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기억에 전하지 못한 말이 차곡차곡 쌓인다. 홀로 지내는 그 한적한 시간이 후회와 아쉬움으로 점철된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이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책은 아니다. 
    우울하고, 침울하고, 을시년스럽기까지 한 분위기의 소설은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아쉬움, 그 덕분에 생겨난 아련함, 그리고 미련은 솔직하고 현명하지 못한 대화의 결과가 아닐까.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서간체인 '환상의 빛',  그 외 단편 3 개는 하고 싶은, 해야 할 말을 전하지 못한 미래를 미리 보게 했다. 

    침묵은 금이라 하지만,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가치 있는 대화는 삶을 보다 따스하고 풍요롭게 한다. 상대와 동조하고 공명되는 관계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상대를 더 기쁘게 보낼 것이다.


    Photo by Clem Onojeghu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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