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만큼만

2020. 6. 8. 21:19지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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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얼갈이 겉절이부터였다. 

왜 였을까? 김치는 집에서 담근다. 김치 맛이 가정마다 다르지 않은데. 가정의 전통이 김치에만 묻어있지 않은데. 어머니가 매년 김치를 담그셨고 김장 김치를 다 먹으면 철에 맞는 김치를 담그셨다. 처가 어머님도 매년, 철마다 김치를 담그신다. 배추와 무를 절이는 것을 도와 드리고, 함께 무채를 만들었다. 굳이 김치를 집에서 담가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김치를 사서 먹을 때면 어머니 생각이 난 적은 몇 번 있다. 단지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김치는 집에서 담가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새 강해져 있었다.

마트가 얼갈이를 싸게 판매할 때가 있다. 대부분 지역 농가의 작물이었다. 지역 농가의 작물이라도 싸게 혹은 싸지 않게 판매했다. 된장국을 끓일 때 얼갈이를 사용한 적은 있다. 

거의 매일 포털 사이트의 푸드 섹션을 본다. 영양학을 전공했고 제대 후에는 저녁을 직접 조리하기도 했다. 육군 격오지에서 근무한 덕분에 부대원 전체가 돌아가며 식사 준비를 했기 때문에 조리는 익숙하다. 곤로에 솥 밥을 했고 십여 명의 식사를 하루 3 번 준비했다. 밑반찬보다 메뉴에 따라 끼니마다 만들었다. 닭튀김은 패스트푸드의 맛을 기억해 구현해 보려고도 했다. 집에서 조리를 직접 하면서 레시피 서적, 매일 푸드 섹션에 소개되는 레시피를 즐겨 본다.

레시피를 어떻게 고르나? 사진의 모습이 맛있게 보이는 레시피를 선택하면 거의 성공이었다. 외우지 않는다. 예전에 조리했던 메뉴라도 매번이고 레시피를 찾는다. 다행히 북마크를 해두었다면 찾는 시간이 단축됐다. 어머니는 머릿속으로 메뉴를 생각해 장을 보고 부엌에서 조리를 하시던 모습에서 레시피를 뒤적이는 적이 없었다. 유명 셰프는 수십 가지의 레시피가 머릿속에 있다던가? 난 어머니도 아니도 셰프도 아니며 디지털을 태생부터 경험한 세대다. 내 손엔 언제나 수십 대의 대형 서버가 지원하는 검색엔진이 24X7 대기하고 있다.

마트에서 얼갈이를 구매하고, 된장국을 끓이고 반 이상이 남았다. 얼갈이 겉절이 레시피를 검색한다. 소금물에 30분 정도 절이고 두 번 정도 찬물에 헹군다. 연약한 조직이니 살살. 풀죽은 집에 남아 있는 박력분으로 쑤었다. 처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고춧가루를 냉동실에서 꺼냈다. 마늘은 떨어지지 않게 사두니 그걸 사용하면 된다. 양파와 파, 마늘을 블렌더에 넣고 간다. 풀죽에 양념 재료를 모두 넣고 꼼꼼히 섞는다. 절인 얼갈이를 양념에 버무린다. 빈 김장김치 통을 꺼내어 담고 상온에서 하루를 놓아둔 후 냉장고에서 다시 하루를 보낸다.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얼갈이 물김치. 겉절이와 다른 부분은 고춧가루 물을 내는 것이다. 레시피에는 고춧가루와 물을 넣고 고춧물을 내거나 홍고추를 갈아서 쓴다고 했다. 나는 정수에 고춧가루를 분량대로 넣고 30분 정도 놓아둔 후 채에 고춧가루를 걸러 고춧물을 만들었다. 맛을 보고 정수를 약간 더 추가했다. 이번에는 설탕을 넣지 않고 배를 갈아 넣으라고 레시피에 적혀 있었다. 아내가 얼갈이 물김치를 처가에 가져갔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럴 리가?’ 초보자의 손맛인데.

처가 부모님이 강원도에서 텃밭을 하신다. 열무를 주셨다. 열무 물김치 레시피를 찾았다. 얼갈이를 넣는단다. 얼갈이는 30분 소금물에 절여 헹구어 물을 뺐고 열무는 2시간 정도 소금물에 절였다. 이번엔 홍고추를 사서 편으로 썰어 넣었다. 가니쉬 같은 분위기. 두 단 정도를 주셨는데 내친 김에 모두 절여 물김치를 담갔다. 하루 반을 상온에 두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거품이 살살 올라온다. 쨍 하는 맛이 있었다. 열무 물김치는 대 히트였다. 아내가 도시락을 싸는데, 열무 물김치를 큰 밀폐용기와 작은 밀폐용기에 담아갔다. 사무실에 가서 나눠줄 생각이란다. ‘굳이...’

아내가 오늘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한다. 

“이거 먹어봐.”
“음... 맛있는데? 어머니가 담구셨어?”
“아니! 애 친구 아빠가!”
“어, 어...”

보통 이런 상황이면 미움을 받거나 공적이 된다던데. “그냥 니가 했다고 하지”라고 말했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입 꼬리가 올라간다. 누구나 어떤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완료한다. 주위 칭찬이 있거나 없는 차이다. 잘 했어도 조용한 경우를 포함한다. 저녁 식사 뒷정리를 하고 스마트 폰을 든다. 산골 할머니의 레시피 중에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여름 동치미와 배추 겉절이.

매일 이만큼만 기분 좋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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