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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튈레 / 자살가게(원작 소설)
※ 빠트리스 르꽁트 / 파리의 자상가게(애니메이션; 프랑스)
암울한 사회상을 보여 이 가게가 생겨나 활발하게 장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 준다. 파리의 이 가게는, 키스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홍보를 하자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게다. 부자는 비싼 도구를 구입한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총알 한 알도 돈을 받고 판다. 상품에 프리미엄 상품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재방문 고객(도구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단골은 없다.(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라면 단골이 될 수 있을까?)
생을 끝내야겠다는 마음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실질적인 실행은, 그 포기의 순간이며, 행위는 의식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능과 손 능력의 개발 수준에 따라 영장일 수도, 약간 더 나은 수준일 수도 있겠다. 지능을 가진 덕분에, 고난을 만났을 때 다양한 방법을 구상해 낸다.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도 갔다가 한다. 스스로 생각해서 다른 방법을 적용해 보기도 하고, 팔랑귀는 아니더라도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더 이상 떠올릴 아이디어가 없어 삶의 지속 가능성이 종료됐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삶을 마감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과연 어떤 주제일 때 그런 강력한 포기를 하게 되는 걸까? 가장이라면,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일까? 홀로 사는 사람이라면, 삶을 지속하게 할 원동력인 에너지가 고갈됐다고, 다시 충전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인가? 혹시, 내가 한 잘못으로 복구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여기서 그만!' 혹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죽음으로 책임을 물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공통적인 부분은, 혼자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손을 빌 일이 아니라고, 혹은 타인도 나를 도울 수 없는 지경이라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꼭 죽음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떠남'도 있겠다. 새로운 장소로의 이전으로, 기존의 현실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겠다.
'칩거'도 있겠다.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니 지금의 고난 가득한 시간대가 다 흘러가기를 바라며 숨어 있는 것이다.
'철판'도 있겠다.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의 함정은, 이미 그것들을 모두 해봤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다. 고난이 턱 밑을 지나 얼굴까지 덮어 버렸다. 그동안 생각나는, 들은 모든 방법을 다 전개해 봤다. 그러나 안된다.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는 것이 무리라 여겨지긴 하겠다. 생각에 여유가 없는 상황에 바로 등 뒤에 칼을 꽂을 현실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와중에,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겠나?
그러나 이 모든 의사 결정은 자신이 내린다는 것이 실낱같은 희망이 되진 않을까? 혼자 내리는 의사결정을 보류하고, 손 닿는 모든 사람에게 상의를 구해보면 어떨까?
방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살아왔냐며 대놓고 타박은 하지 않을 것이다, 긍휼히 여길 수는 있어도.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중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손에 잡은 구명줄을 놓으면 바닥없는 나락으로 빠질 것 같지만, 사실 바닥은 바로 아래에 있다. 그리고 그 바닥을 다시 박차고 올라가면 된다. 문구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런 의미의 구절이 있었다. 소설의 내용도, 주제도, 소재도 떠오르지 않지만 이 구절의 의미만은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찾아 관련 정보를 살펴보니 이 절망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세상의 사건들을 한 가지 사상만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내 문제의 해결책은 나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둑도, 실제 플레이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던 길을, 제 3자인 훈수꾼은 잘도 찾아내니 말이다.
작품은, 원작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이나 삶은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맺는다.
정말 삶은 살아볼 만한 시간인가? 지낼 만한 공간인가? 신은 운명이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그 질문은 당사자가 이겨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살다 보면 신은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쉬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노력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런데도 누구는 인생에 눌려 허덕이고 누구는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그것을 뚫고 나간다. 그 승리하는 '누구도'가 내가 될 수 없다. 그 승리하는 '누구도'가 바로 나일 수 있다. 그것은, 삶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이다.
이 가게는 끝냄의 행위를 방조하는 곳이 아니다. 행위에 실패해 더 큰 고난 속에 살 가능성을 제거해 주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은 가게를 폐쇄한다. 왜일까? 삶을 버릴 수 있는, 그런 행위를 도울 조그만 꼬투리까지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일까? 그로 인해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한 번 더 땅을 박차라고 말하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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